[침선의 기억을 따라 만난 사람들②] 성신여자대학교 박광훈복식박물관 전문위원 김기상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11호 박광훈 子)
[MBN스타 유지혜 기자] “전통은 길어 올리는 겁니다, 우물처럼. 저 깊숙한 곳에 묻혀 잠들어있는 전통을 계속 찾아내고 꺼내서 보존하는 게 저희의 임무 아닐까요.”
어머니 박광훈 침선장을 이어 바늘을 잡은 김기상 씨는 ‘전통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거침없이 답했다. 그에게 전통이란 늘 바느질을 멈추지 않고, 과거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한복에 담아냈던 어머니 박광훈 침선장의 뒷모습과도 같았다. 등불 앞에서 새벽을 지새우던 그 고집스런 집념 말이다.
김기상 씨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11호 박광훈 침선장의 맏아들이자 문화재 전수조교이며,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박광훈복식박물관의 전문위원이기도 하다. 김기상 씨는 “희한하게 누님 대신 제가 ‘DNA’를 물려받았다”며 웃었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위치한 ‘박선영 한복연구실’에서 제자들에 바느질을 지도하는 것도 이젠 박광훈 침선장 대신 김기상 씨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제가 젊었을 시절에는 여행사를 운영했어요. 사업차 일본을 갔을 때 현지 가이드가 ‘우동 한 그릇 하실래요’라고 해서 따라갔죠. 그 우동집이 3대째 운영하는 곳이었고, 대학을 나온 사람이 거기서 우동을 뽑고 있더라고요. 머리에 ‘띵’하고 울렸어요. 당시에 어머니를 이을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걸 제가 이어 받아야겠다는 결심이 생겼어요. 물론 처음엔 집안의 반대가 심했어요. 하지만 DNA는 어디 안 가는지, 어머니의 한복 일을 도울 때 마다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께 ‘아들 왜 안 시키냐’고 그랬어요. 어머니께서 제게 직접 무언가를 가르쳐 주신 적은 없어요. 자랑 같지만 그 DNA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한복을 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젊었을 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웃음을 짓던 김기상 씨는 “자유로워야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복에 ‘푹 빠져서’ 뒤늦게 한복학과에서 학위를 따고, 어머니가 밟았던 길을 고스란히 밟기 시작했다. 김기상 씨는 “그럼에도 어머니를 따라잡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고 손을 내저었다.
“최근에 논문을 쓰기 위해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자료들을 쭉 둘러보는데, 어머니께서 모든 책자에 일일이 연필로 유물 치수를 뽑아서 표시해놓고, 밑줄을 그어놓은 걸 보게 됐어요. 전엔 어머니로서 존경했다면, 한복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어머니를 어머니로서뿐 아니라 문화재로서도 존경하게 됐어요. 아버지께서 장손이셨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집안의 대소사를 다 챙기셔야 했는데, 낮엔 그렇게 집안일을 하고 새벽 내내 바늘을 붙잡으셨어요. 전엔 ‘왜 저렇게까지’란 생각을 했는데 이젠 알겠더라고요. 하면 할수록 빠진다는 걸 말이에요.”
김기상 씨는 한복을 하면서 그의 매력에 제대로 ‘중독’됐다고 표현했다. 치수에 딱 맞게 하나의 한복을 만들어내면 그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고. 그는 “한평생 어머니께서는 미싱을 절대 못 쓰게 하셨다”며 손바느질을 ‘고집스레’ 고수한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런 어머니 아래에서 한복을 하니 김기상 씨도 어느새 그의 손바느질을 배우기 위해 전국 팔도 사람들이 모여들 정도의 실력자가 됐다.
“어머니께서는 가끔 ‘나 돈 바라고 이 짓 했으면 광화문에 20층 넘는 건물 지었다’는 농담을 하셨어요. 어머니께서는 한복 입어주는 분이 고마워서 한복을 짓는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저 또한 그래요. 제가 만든 한복을 한 번 입어주면 그게 고맙고 뿌듯해요. 하지만 아쉬운 건, 최근에 나오는 한복들은 대부분 서양복식처럼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전통복식은 평면재단이라 진동(팔과 몸판이 붙는 부분)을 직선으로 하기 때문에 입으면 편안하고, 유행을 타지 않는 우아함이 있어요. 하지만 서양복처럼 재단된 한복은 진동을 몸쪽으로 약간 들어가게 곡선으로 만들기 때문에 몸통 천이 들리고 불편해요. 이런 차이점들을 젊은이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한복은 불편하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김기상 씨는 “전통복식이라는 건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를 따라서 하는 것”이라며 전통복식을 모른 채로 ‘퓨전’ 혹은 ‘서양식 한복’에 익숙해져가는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했다. “한국복식의 약자가 ‘한복’”이라며 자신처럼 전통한복을 지키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점점 전통을 지켜가는 게 까다로워지는 현실 세태가 아쉽다고도 덧붙였다.
“지금 한복업계에는 중국과 베트남에서 들여온 한복들이 많아요. 정작 전통한복을 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힘든 상황이죠. 전통한복이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해외에서 만들어온 ‘퓨전한복’이 주목 받는 게 아쉬울 뿐이에요. 물론 이런 상황을 만든 건 한복 값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올려놓은 일부 한복업계 사람들의 탓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외려 전통한복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 애로사항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김기상 씨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 전통한복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신여자대학교 박광훈복식박물관이다. 2011년 11월 개관한 박광훈복식박물관은 박광훈 침선장이 기증한 600여 점의 복식을 출생에서 임종까지 삶의 여정을 보여줄 수 있도록 전시한 공간이다. 박광훈복식박물관을 통해 김기상 씨는 ‘공간’에 대한 중요성을 알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드나들면서 유심히 한국복식을 살펴보는 걸 보면서 ‘역시 각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작은 기회를 통해 전통복식이 눈에 익은 학생들은 나중에 결혼을 하거나 자녀의 백일, 돌이 되면 ‘한복’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전통복식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시스템적으로 부족한 게 현실이에요. 전통한복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물을 출토하고 재현할 수 있게끔 하고, 이런 재현물을 통해 사람들에 한국복식을 알릴 수 있는 복합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어요.”
계속 이어가야 할 ‘전통’은 찾아내고, 이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김기상 씨는 설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발굴’하는 게 상당히 까다로운 과정이다. 전통복식은 대부분 책을 통해 재현되는데, 복식의 형태와 색만 그려져 있는 책을 보고 완벽하게 당시의 복식을 재현해내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나마도 자료가 전무한 시대도 있다고.
“고려시대의 책은 많이 손실이 돼 자료가 거의 없고, 불상 안에 직물이 들어있는 불복장을 통해 조금씩 발굴될 뿐이에요. 손실된 자료들을 찾고 또 찾아서 전통복식을 조금씩 재현해가는 거죠. 까다롭지만 조상들의 옷을 알아내기 위해선 꼭 해야만 하는 과정이죠. 하지만 아쉬운 건 정작 전통복식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출토물을 직접 보기 힘들다는 거예요. 출토물은 대부분 보존을 위해 박물관이나 연구소로 곧바로 보내지는데, 이걸 직접 보려면 절차가 매우 복잡해요. 학생들이 전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과거의 유산을 토대로 ‘퓨전’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그런 복잡한 절차는 아쉬운 부분 중 하나죠. 그래서 박광훈복식박물관 같은 공간들이 더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하지만 김기상 씨는 ‘전통한복’의 미래에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전통한복을 배우기 위해 ‘박선영 한복연구소’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최근 조금씩 늘고 있다고. 그는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한복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다”고 말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한복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며 그는 ‘한복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전통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제가 출강하는 강의에도 50명 씩 수강신청을 하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의 관심이 높아진 걸 느껴요. 지금 ‘박선영 한복연구소’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저 친구도 스물 네 살이에요. 의상을 전공하지만, 전통한복을 배우기 위해 따로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만큼 나름대로의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해서 저를 찾아오는 것 아닐까요? 한복을 맞추러 오는 분들도 젊은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고요. 전통복식의 우아함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김기상 씨는 “여건이 된다면 한복에 관해 제대로 된 책을 써보고 싶다”고 마지막 염원을 드러냈다. 거기에 한복을 계속 알릴 수 있는 자리가 생긴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덧붙였다. 김기상 씨는 “그렇게 꾸준히 한복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웃음을 지었다. 현대사회에서 전통이라는 뿌리를 다져나가는 김기상 씨의 마음가짐 또한 새벽에도 바늘을 놓지 않았던 그의 어머니, 박광훈 침선정과 꼭 닮아있었다.
“우리나라 역사가 기록한 복식을 차곡차곡 모아서 제대로 된 책을 하나 써보고 싶어요. 복식사는 이미 많으니까, 구성학 쪽, 그러니까 한복을 만드는 것을 집대성한 책을 말이에요. 한복 만드는 걸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책을 내면, 많은 이들이 그 책을 보고 더 쉽게 한복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거기에 어머니의 한복을 전시한 것처럼 더 많은 공간에서 한복을 전시하고 더 많은 이들이 전통한복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그게 제 꿈이자 소원이에요.”
‘손의 기억, 침선의
기록’은 (재)종로문화재단과 함께 무지개다리지원사업 문화지구사랑방 문.지.방.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종로문화재단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함께 우리 사회의 문화다양성을 발굴하고, 공유하는 무지개다리사업 문화지구사랑방 문.지.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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