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형태의 괴물 의상이 전시장 입구 천장에 매달려 있다. ‘화단의 여전사’ 이불(52)이 입던 옷이자 조각이다. 1990년 당시 30대였던 이불은 이 돌연변이 생명체 같은 옷을 입고 김포공항에서 일본 나리타 공항, 도쿄 시내를 장장 12일간 활보했다. ‘괴물’과 만난 일본인들은 놀라거나 피해다니는 등 다양한 반응을 쏟아냈고 이는 고스란히 ‘수난유감-당신은 내가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줄 알아?’라는 파격적 제목의 영상을 통해 발표됐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3일 개막한 ‘X: 1990년대 한국미술’ 전시는 도발적인 이불의 작품부터 시작돼 1990년대의 서막을 알린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나 가요 등 대중문화계에선 수년 전부터 90년대를 재조명하는 분위기였지만 미술계에서 이 시대를 진지하게 되돌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불을 포함해 고낙범 이형주 강형구 샌정 진달래 이동기 등 1990년대 미술계를 주름잡던 ‘앙팡테리블’ 30여명의 작품 60여점이 전시장에 나왔다. 퍼포먼스나 설치 미술 중에는 없어진 것도 많아 전시를 위해 다시 제작된 것도 상당수다.
1990년대는 열정과 실험, 에너지가 대폭발하던 시기였다. 회화 중심에서 벗어나 설치나 영상 퍼포먼스 등 매체 실험이 활발했으며 대중문화 영향을 받은 팝아트 계열의 작품도 본격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 90년대로 잡은 시기는 88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인 1987년부터 IMF 위기가 불어닥치기 직전인 1996년까지다. 이 10년간 갤러리와 미술관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시가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도 1988년 개관했고 금호미술관과 성곡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등도 1990년대 들어섰다. 미술의 제도적인 발판이 올림픽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마련된 것이다.
당시 X세대로 불린 신세대 작가들은 단발적 프로젝트를 위해 이합집산하는 소그룹 활동으로 존재감을 보여줬다. 이전 세대의 소그룹이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는 조직화된 모임의 형태였다면, 이들은 프로젝트의 주제에 따라 구성원, 매체, 전시 방식이 변화하는 일시적 성격이 두드러졌다는 평가다.
여경환 큐레이터는 “1970년대 단색화, 1980년대 민중미술과 달리 1990년대는 진지함 혹은 권위를 벗어던진 탈이데올로기적 시대였다”며 “90년대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동시대 미술이 시작된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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