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 축성 100주년을 맞은 명동성당 제대 앞에 승복을 입은 승려 한 명이 섰다. 법정 스님이었다. 길상사 낙성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했던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스님은 침묵을 깨고 천천히 자기반성으로 시작되는 강론을 펼쳤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얼마나 이웃을 사랑했는가를 두고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구절을 읽으며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내가 이웃 앞에서 얼마나 따뜻했는지."
스님은 곧이어 프란치스코 성인을 거론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과 겸손을 보다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모든 집과 움막을 흙과 나무로만 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다 가야 합니다."
성당을 가득 메운 신자들은 뜨거운 박수로 보답했다.
10쪽 분량의 명동성당 강론 내용은 녹취를 하지 않아 사라질 뻔 했다. 다행스럽게 현장에 있던 이해인 수녀가 개인적으로 녹음한 것을 복원해 책에 수록될 수 있었다.
법정스님의 강론과 편지글 등을 모은 '시작할때 그 마음으로'(책읽는 섬 펴냄)이 출간됐다.
법정스님의 조카인 현장스님이 엮은 책에는 명동성당 강론을 비롯 2010년 연세대 학술회의 발제문, 지인들에게 보냈던 편지와 연하장 등 기존에 공개되지 않았던 내용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스님이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수녀원에서 하루를 쉬면서 아침 미사에 참례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보다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그 곳의 질서와 고요가 내 속 뜰에까지 울려 왔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 수도자도 자기 도취에 쉽게
스님은 이해인 수녀에게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기도를 하자며 편지를 끝맺는다.
우리시대의 선승이자 뛰어난 에세이스트로서의 면모를 다시금 만나게 해주는 책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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