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 담긴 아역 배우의 연기, 자연 채광을 적극 활용한 연출 등 '벌새' 매력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1990년대를 재현하는 방식'을 빼놓을 수 없다. 1994년을 살아가는 14세 은희가 거니는 골목, 노래방과 학교를 모두 그 시절을 통으로 옮긴 듯 사실감 있게 묘사했다.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원준희 '사랑은 유리 같은 것' 등 당대 유행가도 곳곳에서 귀를 사로잡는다.
1990년대에 만든 콘텐츠가 한국 문화계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음악, 도서 등 전 분야가 당시 작품으로 수놓이는 중이다. '90년생(生)이 온다'가 아닌 '90년산(産)이 온다'고 표현할 만한 유행이다.
'벌새'와 동시에 8월 말 개봉한 '유열의 음악앨범'도 1994년을 배경으로 삼았다. 라디오 프로그램 '유열의 음악앨범'이 시작한 날 만나게 된 두 남녀 이야기를 담았다. 주인공인 정해인과 김고은이 방에서 만화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는 장면이라든지, PC통신으로 연인이 소통하는 모습엔 웹툰과 카카오톡 세상에선 경험할 수 없는 정감이 가득하다.
복고풍 드라마와 영화에서 삽입곡으로 찔끔찔끔 듣던 1990년대 가요를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유튜브 채널도 열렸다. 17만여 구독자를 자랑하는 'SBS K팝 클래식'이다. 1990년대 '인기가요'를 시청할 뿐만 아니라 감상자끼리 대화도 활발하게 나눈다. 임창정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부르고 있으면, '자막에서 비디오의 향기가 느껴진다' '오빠랑 결혼하고 싶었어요' '아 그래도 그때가 좋았는데'라고 채팅창에 올린다. 주요 시청자인 30대들은 'K팝 클래식'을 비롯한 유사 채널들을 '온라인 탑골공원'이라고 부르며 이미 '낡은 것'이 된 본인 취향을 자조한다.
역사상 다양한 복고 붐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특정 연대 콘텐츠를 중심으로 열풍이 인 건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1990년대는 K팝을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화하고 업그레이드된 출발점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992년 데뷔한 서태지를 시작으로 1996년 H.O.T., 1997년 젝스키스, 1998년 핑클까지 '아이돌 조상'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한동윤 음악평론가는 "현재의 10, 20대에겐 '올드한 음악' 중 가장 가깝게 느낄 노래가 1990년대에 나온 것들"이라며 "최근 H.O.T. 젝스키스, 핑클 등이 재결합하고 브라운관에서 모습을 자주 노출하는 영향도 작지 않다"고 말했다.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사회에 지친 청년들이 과거에서 위로받는다는 시선도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자기계발'과 '스펙관리'가 한국에 본격화하기 직전인 1990년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당시 대학을 다녔던 세대가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 옛날 대학교는 그닥 각박하지 않았다고 느끼게 된다"며 "경제가 힘들어지고 여유가 없어지다 보면 과거 푸근했던 시대가 떠오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튜브를 포함한 각종 영상 플랫폼이 발달하며 과거 콘텐츠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 것도 '1990년대 신드롬'에 한몫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콘텐츠를 재발견하고 공유하는 문화가 세대 문화로 등극했다"며 "아까운 망작(망한 작품)과 콘텐츠를 발굴해서 다시 주목받게 하는 '콘텐츠 고고학자 놀이'가 인기"라고 해석했다.
레트로 붐을 일으키는 1990년대 콘텐츠에 한국산만 있는 건 아니다. 시대를 풍미했던 해외 콘텐츠도 속속 귀환하고 있다. 1985년 한국서 처음 방영된 이래 1990년대 줄기차게 재방송됐던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이 대표적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나가는 주인공 앤의 모습이 당시를 추억하는 팬들에게 위로를 주면서 전시와 드라마, 도서 등 각 분야에서 나날이 주가를 높이고 있다. "세상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것 같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 등이 화제가 되는 앤의 명언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 머리 앤'은 시즌이 벌써 2까지 나온 데다가 차기 시즌도 곧 공개된다. 서울 성동구 갤러리아포레 MMM은 현재 진행 중인 전시회
[박창영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