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0년대 초 서울 광화문 전경. 1750년(영조 26) 전국을 휩쓴 독감으로 당시 서울인구(18만명) 보다 많은 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 = 조선고적도보] |
조선왕조실록을 살펴 보면, 위의 전염병과 관련된 용어가 무려 745회나 등장한다. 여역이 418회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역질 255회, 괴질 37회, 역병 27회, 역려 8회 등의 순이다. 그만큼 전염병은 강력하고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전염병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선조 21년(1588) 음력 2월에 의안군(1577~1588)이 역질을 얻어 당일 죽었다"고 실록은 기술한다. 의안군은 선조가 아끼던 인빈 김 씨(1555~1613·원종의 친모이자 인조의 할머니)의 첫째 아들이다. 의안군은 총명해 선조가 편애했다. 선조는 크게 슬퍼해 3일간 조정의 공사를 폐했다.
폭군 연산군도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중종 1년(1506) 11월 7일 실록은 "(강화에 위폐된) 연산군이 역질로 몹시 괴로워 하여 물도 마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눈도 뜨지 못해 의원을 보내 돌보게 했다"고 적었다. 다음날 실록에 "연산군이 '부인(폐비 신씨)을 보고 싶다'는 말만 남기고 죽자 왕자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전염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영조시대에 닥쳤다. 바로 영조 26년(1750) '경오년 역질'이다. 경오년 역질은 1749년(영조 25) 음력 12월초 김포와 남양(화성)에서 처음 발생한다. 한창 겨울이었으니 역질은 인플루엔자일 가능성이 높다.
12월 13일 실록은 "임금이 이이장을 암행어사로 보내 사망자에 대해 보고 받았다"고 했다. 영조는 사태수습을 제대로 못한 남양부사와 김포군수를 체포해 벌주고 고통받는 두 지역에 세금과 각종 의무를 면제할 것을 지시한다. 재앙은 서막에 불과했다. 역질은 경기와 황해도를 거쳐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1월 5일 실록은 "팔도에 전염병이 치성하여 죽은 자가 즐비하다"며 "시신을 묻는 일이 큰 일"이라며 서술한다. 사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1월에 1만1692명이 죽은 것을 시작으로 2월 6233명, 3월 3만7581명, 4월 2만5547명이 희생됐다. 질병은 날씨가 더워졌는데도 여전히 맹위를 떨쳐 5월 1만9849명, 6월 3만300명, 7월 2만2261명, 8월 224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월별 실록에 집계된 희생자수만 합쳐 15만5709명이다.
이미 5월 15일 실록에서 영의정 조현명이 당상관 이상의 모든 관리들이 모인 대책회의 자리에서 "각 도의 장계를 보면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12만4000여명에 이른다"고 밝힌 것으로 미뤄 5월 이후의 사망자까지 합치면 희생자는 20만명이 충분히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한양이 18만명이고 전국적으로 661만명이었다. 경오년 전염병으로 한양의 인구가 한번에 사라졌던 것이다.
↑ 시궁창 같은 데서 채소를 사고 파는 사람들(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반). 조선시대에는 위생관념이 없어 전염병에 매우 취약했다. [사진 = 미국 헌팅턴도서관] |
21세기에 또다른 전염병 코로나19가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며칠새 확진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2000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도 13명을 기록했다. 앞으로 사태가 더 악화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뿐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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