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분당에서 20억원대 주상복합에 거주하고 있는 이정석 씨(가명·29)는 금융자산만 수 십억원에 이르는 이른바 ‘슈퍼리치’ 가문이다. 현재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지만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그와 가족들은 평범한 중산층으로 알려져 있다. 오직 시계를 제외하고는 주중에 명품을 몸에 두르는 ‘실수(?)’도 하지 않는다. 그는 “된장남, 된장녀 등 부자들이 졸부로 오해 받는 현실에서 내가 즐길 수 있는 사치는 해외 오페라 공연 있을 때 월차를 내고 몰래 다녀오는 정도”라며 “한국의 반(反) 부유층 정서는 유난하다”고 한숨을 쉰다.
내수 진작의 ‘마중물’이 돼야 할 슈퍼리치들의 ‘지갑’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매일경제가 만난 슈퍼리치들은 대부분 “돈질을 하려거던 나가서 하라”는 식의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며 쉽게 지갑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 전문가들이 내수활성화의 첫 걸음으로 부자들의 돈지갑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의 지출이 불쏘시개가 돼 민간소비 지출증가를 견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적극적인 소비가 ‘산업생산 증가→일자리 확대→가계소득 증가→다시 소비지출 증가’로 이어져 내수활성화의 선순환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
이는 2013년 말 기준 16만7000명에 이르는 한국의 슈퍼리치(금융자산 10억원 이상 개인) 규모를 고려할 때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KB경영연구소가 집계한 이들의 금융자산만 369조원대로 이는 국내 가계 총 금융자산의 14%에 육박하고 있다.
문제는 사회의 뿌리 깊은 반(反)부유층 심리 등으로 인해 이들이 실제 버는 돈에 비해 ‘너무 적은’ 액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KB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이들 고자산가의 월평균 소비지출은 1022만원으로 일반가구(251만원)보다 4배 큰 반면 이들의 지출 잠재력을 가늠할 수 있는 월평균 가계수지(소득-지출)는 1517만원으로 일반가구(170만원)보다 무려 9배나 높았다. 이처럼 지출 잠재력과 실제 지출 규모에서 발생하는 현저한 차이만 줄여도 내수 진작의 마중물로 쓸 수 있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한국의 슈퍼리치’ 저자인 신동일 KB국민은행 PB팀장은 “한마디로 슈퍼리치의 특성은 남의 시선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지갑을 닫는 것”이라며 “국내 백화점도 신경이 쓰이니까 해외에서 소비하는 흐름이 확산되고 백화점 업계의 실적 부진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해다.
이와 관련해 경제 전문가들은 정부를 향해 “부자들이 왜 돈을 안쓰냐고 물을 게 아니라, 이들이 돈을 풀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비스산업 선진화, 유통구조 개선, 세제혜택 등 다양한 대책을 제시하면서 무엇보다 이들이 지갑을 열 수 있는 우호적인 사회·제도적 환경부터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내수 활성화의 타깃을 중산층에서 고자산가로 과감히 바꾸는 선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처방이다.
김영세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부자들의 해외소비를 가속화하는 핵심 요인 중 하나가 바로 한국경제의 허약한 서비스산업 경쟁력”이라며 “당장 해외관광만 보더라도 일본과 서유럽이 장기간에 걸쳐 문화관광 자원을 개발한 데 비해 한국은 부자들이 만족감을 느끼고 지출할 곳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박승안 우리은행 투체어스 강남PB센터장은 구체적으로 “나이가 많은 고액 자산가들의 최우선 관심사항은 바로 여행”이라며 “돈 쓰는게 즐겁고 기꺼이 쓸만한 곳을 다양하게 만들고 이에
유병규 국민경제자문회의 지원단장 역시 “부유층의 소비여력과 더불어 중국과 동남아의 고자산 관광객들을 묶어 이들이 국내에서 돈을 쓸 수 있는 고급 소비재 시장을 빨리 늘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재철 기자 / 김시균 기자 / 안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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