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년 이내에 단일 건으로 3억원 이상 작업복을 납품한 실적이 있을 것.”
“서울에 소재한 업체이어야 하며 과거 납품 실적은 정부부처 이외에 다른 민간기관에 제공한 리서치 실적은 인정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는 별 문제 없어 보이는 몇몇 공기업들 입찰자격 기준이다. 하지만 기존에 정부나 공기업에 납품 실적이 있는 중견기업에게는 손쉬운 입찰자격일지 몰라도 새로 설립된 신생 중소기업 입장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제한이다. 기존 납품업체에 유착 관계에 있는 공기업 구매담당자들이 입찰 자격 요건을 교묘히 이용해 ‘갑질’에 나선다는 것은 업계에선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부의 공기업 분류상 ‘기타공공기관’에 속하는 C공단은 여러차례 컨설팅 용역을 발주하면서 ‘서울에 있는 업체일 것’과 ‘정부부처 외에 다른 민간 리서치 실적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입찰 자격을 중복으로 제한해왔다. 입찰 자격 요건이 강화될 수가 특정업체가 비슷한 컨설팅 용역을 반복적으로 따낼 가능성은 높아진다.
“어, 그런 법이 있었나요?”(C공단 조달 담당자) 최근의 정부 공공기관 감사에서 문제를 지적 당한 C공단 조달 담당자의 대답은 “규정을 잘 몰라서”였다. C공단 조달 담당자가 컨설팅 업체와 유착관계 때문에 의도적인 ‘갑질’을 했는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행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처럼 입찰자격 중복제한을 금지 조항을 위반한 것은 분명하다.
더 큰 문제는 C공단처럼 규모가 크지 않은 소규모 공기업의 경우 이런 법 자체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전 회계연도 기준 자산규모가 1000억원 미만이고 당해연도 예산규모가 500억원 미만인 경우 국가계약법이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 구매 담당자가 무슨 짓을 해도 정부 감시망 바깥에 머물게 되는 셈이다.
D공기업은 4억 3000만원 규모 하계작업복을 구매하면서 “최근 2년 이내 단일 건으로 3억원 이상 작업복을 납품한 실적이 있을 것”이라는 제한을 뒀다. 작업복의 경우 중소기업청장이 정해 고시하는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에 속한다. 특수한 성능이나 품질이 요구되는 물품이 아니기 때문에 제한경쟁입찰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D공기업 구매담당자는 “관행적으로 그래 왔다”고 대답했다.
신생 중소기업들이 아예 입찰을 못하게 하는 엉터리 입찰 공고 사례는 한두개가 아니다.
이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은 공기업과 지방자치단체에서 직접 조달을 담당하는 직원들의 전문성 부족과 근무태만, 그리고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고의적인 갑질 때문이란 지적이 많다.
한 정부 관계자는 “중앙 부처가 직접 관할하는 대규모 공기업의 경우 제도적으로 갑질 방지책과 감시망이 촘촘히 짜여져 있어 구매 갑질 행태가 적발되는 경우가 과거보다 적다”며 “하지만 지방자치단체나 지방 공기업들의 경우 제도적인 미비점이 많은데다 정부에서 정확한 실태 파악도 제대로 안 돼 있다”고 말했다.
실제 정부에서는 법률적으로 기타 공공기관에 해당하는 300여개 공기업 가운데 국가계약법에 적용되는 곳이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공기업, 지자체 전체 구매 규모도 정확한 통계치가 없다.
중앙부처 조달과 달리 통일된 기준이 없다보니 같은 제품에 대해서 공기업과 지자체별로 서로 다른 낙찰기준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문제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어렵사리 입찰제한 기준을 맞춰서 공기업 한 곳을 납품처로 뚫었는데 다른 기관은 또 다른 납품 요구사항을 내놓는다”며 “공기업 조달 시장을 뚫기 위해 스펙을 맞추고 서류 만드는 데만 1억원을 쓴 업체도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이 공공 조달시장에 매달리는 이유는 공공 조달 납품 실적이 민간 기업 납품과 수출 때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전체 110조 규모 공공조달시장 중에서 이처럼 공기업과 지자체가 직접 구매를 하는 시장만 77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달청은 이 가운데 시설공사 계약을 뺀 물품·용역계약 시장만 22조원 규
조달 관련 한 전문가는 “정부의 감시망을 벗어난 공공연한 ‘갑질’ 계약이 이뤄지고 있고, 또 통일된 기준의 물품 구매도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공기업과 지자체 구매담당자들의 과도한 갑질을 제한할 수 있는 통일된 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조시영 기자 / 이승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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