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0일, 서울에 위치한 대형마트의 한 식품매장. 판매대에는 호박고구마, 밤고구마 등 여러 종류의 고구마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품종 구분은 없었다. 점원에게 “현재 판매되고 있는 호박 고구마의 품종이 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호박 고구마 품종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고구마가 담겨있는 박스를 아무리 뒤져봐도 원산지별로 구분해 놓았을 뿐이다. 인근에 위치한 또다른 대형마트도 마찬가지였다. 품종은 사라졌고 호박 고구마, 밤 고구마 등 맛 위주의 분류가 전부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손에 쥐고 호호 불어먹던 기억이 사라질지 모른다. 국내 고구마의 품종 관리가 제대로 안된 탓에 대부분 수입산, 잡종 고구마가 시장을 장악하면서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고구마 생산성은 물론 맛까지 떨어질 수 있다. 향후 중국산 고구마가 들어올 경우 국내 고구마 시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이유다.
세계 7대 작물 중 하나로 꼽히는 고구마는 1763년 처음 국내에 소개됐다.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이지만 현재 전세계 생산량의 80%가 중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 재배되고 있다. 고구마가 웰빙식품으로 자리잡으며 국내 고구마 시장은 지난해 3674억원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서 고구마의 위치는 불안하다. 품종구분이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고구마도 품종 관리 보다는 맛 위주의 섞어팔기가 대부분이었다. 호박 고구마 5개를 사면 이중 1~2개는 호박고구마 맛이 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품종이란 식물 분류학상에서 동일 종에 속하면서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현재 국내서 판매되는 고구마는 호박맛, 밤맛 등으로 구분해 팔고 있지만 엄연히 얘기하면 같은 품종이라고 볼 수 없다. 김선형 서울시립대 환경원예학과 교수는 “밤고구마, 물고구마, 호박고구마 등은 원래 고구마 품종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대강 밤맛, 단호박 맛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지 품종명은 아니다”라며 “품종 구분 없이 잡종 고구마들이 섞여 판매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서울시립대에서 경기도에 위치한 대형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호박 고구마를 대상으로 DNA를 조사한 결과 10개로 묶어파는 고구마에 5종의 품종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선형 교수는 “대형 유통업체에서 품종별 판매가 되고 있지 않다보니 소비자들은 비슷한 맛을 내는 여러 고구마를 먹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품종관리가 되지 않으니 국내 고구마는 바이러스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국립농업과학원이 전남과 전북, 경기, 충남, 충북 등 전국 주요 고구마 재배지에 있는 고구마를 조사한 결과 99%의 고구마가 식물성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됐다. 고구마에만 감염되는 이 바이러스는 인체에는 전혀 해가 없지만, 고구마에는 색깔이 갈색으로 변하고 얼룩무늬 모양의 줄무늬가 생기는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맛이 떨어지면서 상품가치가 하락하는 치명적 영향을 준다.
최수홍 국립농업과학원 작물보호과 연구관은 “중국에서 이 바이러스가 유행했을 때 고구마 수확량이 50% 감소하고 맛이 떨어지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며 “아무 고구마나 막 심다보니 바이러스가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품종 구분 없는 고구마를 계속 심는다면 바이러스의 확산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일부 지방을 중심으로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은 고구마를 농가에 보급하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품종이 확인되지 않은 다른 고구마와 함께 심는 경우가 많아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가 어렵다.
반면 일본과 중국 등 가까운 아시아 시장에서는 고구마 품종 관리가 ‘칼같이’ 이뤄지고 있다. 일본 쇼핑몰 사이트에 들어가면 ‘안노베니’, ‘안노이모’, ‘베니사쯔마’ 등 다양한 고구마 품종을 소비자들이 선택해 구매할 수 있다. 일본은 과거 고구마의 무분별한 재배로 인한 농가소득 저하를 초래했지만 이후 품종 관리에 힘쓴 결과 현재 판매되는 고구마는 철저히 품종별 분류가 이뤄지고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품종관리에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농촌진흥청은 1980년대 밤맛 계열의 신율미와 율미, 2014년에는 호박계열의 풍원미를 개발해 보급했지만 농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김선형 교수는 “농촌진흥청의 인력 부족, 대형 마트의 품종 구분 없는 고구마 유통 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굳이 품종이 보존된 고구마를 기르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중국과의 FTA로 인해 고구마 시장이 열리게 되면 국내 고구마 시장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값싼 고구마가 대량으로 들어오면 국내 고구마는 프리미엄 시장 진출이나 맛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데 품종 관리가 안된 상태에서 이같은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다수의 외래 품종 유입, 고구마 단일 품종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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