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제철공단 입주기업 가운데 30%는 문을 닫고 싶어도 폐업자금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에요. 제철업체 네 곳 중 한 곳은 채권회수가 시급할 정도로 재무상황이 악화돼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적인 ‘공급과잉의 덫’에 가장 먼저 걸린 철강업계의 상황은 한마디로 ‘진퇴양난’이다. 중국 철강업체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국내 중견 철강사들은 갖은 수를 다 써봤지만 결국 부도 위기에 내몰려있다.
실제 지난해 채권단 관리로 넘어간 동부제철은 최근 KS 공장인증까지 반납해 사실상 가동중단 상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동부제철은 고급 고철을 사용해 전기로로 자체적인 열연생산을 하려 했지만, 글로벌 수요 감축과 철광석 가격 하락으로 수익성이 맞지 않아 두 손을 들었다.
지난해 6월에는 동국제강이 포항2후판 공장 가동을 멈추면서 후판 생산 규모를 절반으로 줄였다. 서울 사옥 ‘페럼타워’도 매각했다. 늦게 뛰어든 후판 신설투자는 조선업 불황으로 아예 쓸모없는 일이 됐다.
포스코나 현대제철 같은 메이저 업체들도 중국발 공급과잉 악재로 지난해 사실상 감산을 해왔다. 제작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부가가치는 높은 제품 비중을 늘리면서 용광로는 계속 돌리면서 물량을 줄이는 정책을 써온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철산업의 중심지인 포항의 중견업체들은 고사 위기에 몰렸다.
3일 포항철강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공단 내 기업의 생산액과 수출액이 계속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생산액과 수출액은 각각 9722억원, 2억 1661만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32%, 44%가 줄었다. 올해 1월 생산액과 수출액도 9135억원, 2억 87만달러에 그쳤다.
2000년대 중반 공격적 투자로 세계 시장을 이끌었던 디스플레이 분야도 상황은 심각하다. 액정디스플레이(LCD) 평균 공급가격이 1년새 절반 가까이 폭락하면서 이제는 제조 원가 수준까지 추락했을 정도다.
국내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에서 올해로 넘어온 재고물량도 만만치 않은데 수요가 크게 나아질 전망은 보이질 않아 이제는 생산라인 가동률 자체를 조정해야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업체들이 많다”며 요즘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시장조사기관인 IHS에 따르면 올 1분기 TV나 스마트폰용 디스플레이 출하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가 줄어든 1억 9600만대에 그칠 것으로 추정됐다. 1분기 패널 출하량 자체가 전년동기와 비교할 때 줄어드는 것은 2009년이래 처음이다.
공급과잉 상황은 한국의 주력산업인 반도체에서도 마찬가지다. D램과 함께 메모리 제품을 주도하고 있는 낸드플래시의 경우 초과공급 현상이 심화되면서 지난해 4분기 산업 전체적으로 매출이 2.3%나 줄었다. 낸드플래시는 전원공급이 없을때도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직으로 쌓을 수 있어 좁은 공간에서 메모리 용량을 늘릴 수 있는 장점때문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등에서 인기가 높은 반도체다.
석유화학 부문에서는 기업들이 자체 구조조정에 나서기 시작했다.
국내 1위 가성소다 생산업체인 한화케미칼은 염소·가성소다(CA)를 생산하는 울산공장을 상반기 중 화학업체인 유니드에 매각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염소는 주로 산업현장 살균·세척 용도로, 가성소다는 세제 원료나 수처리 중화제 등에 사용된다. 수요처는 많지만 생산 업체가 많아 유화업계에서 대표적인 ‘레드오션’으로 평가하는 시장이다. 국내 CA 시장은 주요 업체 신증설 경쟁으로 연 공급량이 210만t에 달한다. 수요량 130만t을 훌쩍 뛰어넘어 공급과잉에 빠졌다. 이에 한화와 유니드는 자발적 교통 정리에 나섰다. 유니드는 울산공장을 인수한 뒤 생산설비를 개조해 상대적으로 수요가 많은 가성칼륨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산업계 일부에서는 공급과잉에 따른 재고조정이 이제 바닥부근에 온 것이 아니냐는 신호도 감지된다.
디스플레이산업을 담당하는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지난 2월 대만 지진여파로 경쟁업체인 이노룩스 등의 생산라인 가동중단으로 공급과잉 현상이 일부 해소됐고 올해 신제품에 들어갈 디스플레이 수요가 생겨나면서 2분기에는 가격하락세가 진정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제철업계의 공급과잉도 어느 정도 풀릴 조짐이 나타난다. 중국 지방정부가 소유한 제철공기업들이 고용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으며 무리한 생산을 해왔는데, 여기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중국은 올해 2월부터 지방의 부실화된 제철소부터 감산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중국-한국-일본 순으로, 또 열연-냉연-후판 순으로 가격도 서서히 바닥을
대형 제철회사 관계자는 “중국서 이달부터 실질적인 감산에 들어간 정황을 해외지사를 통해 포착했다”며 “중국 정부는 올해 부실화된 설비 30~40%를 감산한다고 하지만 2%만 제대로 감산이 이뤄져도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성훈 기자 / 김정환 기자 / 전범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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