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3월10일. 한보그룹 신임회장에 정태수 총회장의 3남인 정보근 부회장이 취임했다. 그는 그해 6월 매일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한보그룹이) 매출 10조원대, 재계순위 10위권 진입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고 장담했다. 1970년대 광산업과 건설업에서 출발한 한보그룹은 1990년대 들어 공격적으로 몸집을 키웠다. 한보그룹 위상은 당시 재계 14위에 달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뒤인 1997년 1월 부도를 맞았다. 2조7000억원으로 잡았던 당진제철 투자소요액이 5조7000억원으로 불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빚을 졌는데 유동성이 줄면서 상환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시계를 20년뒤인 현재로 돌리면 한보 사태는 지금의 해운 조선업 위기와 오버랩 된다.
2016년 8월 채권단 자율협약이 종료된 한진해운은 창업자 조중훈 회장이 2002년 타계한 이래 경영권 손바뀜이 잦았다. 셋째 조수호 회장, 부인 최은영 회장, 장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으로 차례로 경영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글로벌 공급 과잉 상태에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는 2010년 1367에서 2015년 500대로 폭락했고 운임이 60% 이상 급락하다 보니 부실이 폭증했다. 국내 해운사들은 2008년 운임이 피크에 달했을 때 장기 계약 변동 요금으로 용선 협상을 맺었는데 이것이 부메랑으로 작용했다.
대선을 1년 앞두고 총파업과 정쟁이 극에 달하는 상황에서 과잉투자→경기 위축→기업 부실 확대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1996년과 오늘날이 유사하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을 시도하고 일본이 엔화 약세 정책을 펴려고 하는 것도 비슷한 패턴이다. 일각에서는 ‘가계 빚’이 당시와 규모가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1996년 보다 더 질이 나쁜 ‘스칸디나비아형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진단한다.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 초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3개국이 겪었던 이른바 ‘스칸디나비아형 위기’는 가계가 빚으로 부동산을 매입한 상태에서 글로벌 경기 위축이 나타났고 이에 주요 수출품(원유) 가격 하락, 부실 채권 상승 등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면서 국가가 난국에 봉착한 것을 가리킨다. 한국도 가계 빚이 막대한 상태다. 올 1분기 가계 빚은 1223조7000억원으로 11분기 연속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고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도 145.6%로 6개월 새 4.9%포인트 올랐다.
앞서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한 기고에서 “경기 충격에 부동산 값이 하락할 경우 은행 부실채권이 급증하고 은행의 자본 적합비율(CAR) 하락으로 이어진다”면서 “이는 외국계 은행들의 크레딧라인 축소와 외국인 자금 이탈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위기 타파를 위해선 정공법이 답이다. 시스템을 개혁하고 자본주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출신인 변양호 보고펀드 고문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창의와 열정을 갖게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법 앞의 제대로 된 평등을 구현하고 ▲감사원의 정책 감사 기능을 폐지해 공무원을 적극적으로 일하도록 하며 ▲산업은행 같은 공공기관에 최고 능력자를 선별 배치하고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를 폐지하자는 제언 등이다.
변 고문은 “예전에는 시장이 경쟁을 안 해도 정부가 리더십을 갖고 이끌면 어느 정도 경제가 굴러갈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정부 힘만으로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수출 감소도 눈여겨 봐야하지만 이 것은 표피적인 현상일 뿐이다. 근본적으로는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서는 개혁이 힘들다”고 말했다.
또 이창양 카이스트 교수는 자본주의 정신의 회복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권력이 국회로 넘어가면서 모든 것이 정치화가 됐고 행정력도 예전보다 기민하지 않게 됐다”면서 “이로 인해 경제 일선에서 뛰는 대기업, 중소기업, 벤처기업,
[기획취재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