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 대표 베이글녀가 10년만에 거머쥔 스크린 주연작 ‘방자전’은 그의 연기인생에 화려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변신’이란 단어는 꼭 그럴 때 써먹으라고 생겨난 말 같았다.
그리고 2년 만의 스크린 컴백작인 ‘후궁:제왕의 첩’(김대승 감독). 조여정은 “’방자전‘이 변신이었다면 ’후궁‘은 성숙”이라고 표현했다.
6일 개봉한 영화 ‘후궁’은 사랑에 미치고, 복수에 미치고, 권력에 미치는,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 사람의 비극적인 사랑과 운명을 그렸다. 지독한 궁에서 벌어지는 애욕의 정사(情事)와 광기의 정사(政事)가 기막히다.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여정은 “찍어놓고 보니 결말이 아팠다”고 했다. 톡 하고 건드리면 금세 눈물 한방울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 새 영화 얘기를 하면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듯, 이따금 눈시울을 붉혔다. 김동욱(성원대군)과 벌인 ‘후궁’의 파격 엔딩신은 그에게도 안타까운 기억인 듯 보였다.
“성원대군이 불쌍해서 울었어요. 내게 헌신적이었던 사람을 그렇게 하고보니… 많이 미안했어요. ‘화연’에서 빠져나오니 연기할 때와는 너무 다른 감정이더라구요.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니 안 불쌍한 인물이 없었어요. 성원대군도 권유(김민준)도 너무 안됐더군요.”
조여정은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지만, 파란만장한 운명을 사는 ‘화연’으로 분했다. 사랑 때문에 후궁이 되어야 했고, 살기 위해 변해야만 했던 슬픈 운명의 여인, ‘방자전’의 춘향이 보다 몇 배는 어려웠음직한 역할이다.
“‘방자전’ 때와는 완전히 색깔이 다른 고민이었어요. 고민의 깊이부터가 달랐죠. ‘춘향이’는 알듯 말듯 발칙하고 소녀적인 느낌이었다면, ‘화연’은 인생의 파도에 대해 정면승부 하는 모습을 스트레이트로 보여준다는 것. 그런 인생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지 못한 저로서는 끊임없이 상상하고 집중하는 것 밖엔 방법이 없더라고요.”
한 테이크가 끝나면 배우들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교류했다. 손동작 하나, 발걸음 하나에도 감정을 불어넣었다. 세밀한 내면연기를 위해 지난 넉달간을 철저히 ‘화연’으로 살았던 그는 “그래도 기분 좋은 스트레스였다”고 빙그레 웃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첫 사랑이 5년 만에 입궁했을 때, ‘화연’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는 적잖은 고민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유일한 혈육 아버지를 잃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하는 장면은 상상하기도 힘든 신이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조여정이란 배우의 열정과 노력을 짐작할 수 있는 명장면에 속한다.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가 아이를 잃고 방바닥을 헤매면서 울부짖는 장면이 오버랩 됐다고 하자 “지금 그 얘기 듣고 소름 돋았어요. 너무 과분하고 감사한 말이에요”하며 눈가가 촉촉해진다.
실제로 베드신에만 집중됐던 영화는 베일을 벗은 후 호평 일색으로 돌아섰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조여정의 독기 서린 팜프파탈 연기는 성장을 넘어 가슴을 파고드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조여정이 왜 용기를 냈을까 생각하는 분들에게 그 답을 충분히 드린 거 같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답을 찾고 좋은 평들을 많이 써주셔서 눈물이 났어요. 엄마도 쏟아진 기사들을 보면서 좋아하셨구요.”
그에게 ‘후궁’은 “작품 자체로 멋지고 눈물이 났다”는 의미 그 이상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확신이 왔고, 영화 안에 앞으로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담겨있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강도 높은 베드신으로 캐스팅 단계에서 몇몇 여배우가 출연을 고사했다는 뒷얘기가 들렸다. 조여정의 해석은 달랐다. “내 눈엔 그게 안보였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왜 다들 안 하지?’ 싶었다”며 “내가 럭키한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예상대로 베드신의 수위는 상당하다.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극중 스토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로 작용한다. 비교하자면 ‘방자전’ 보다 더 센 노출이다. 그에 대한 부담은 없었을까.
“베드신을 단순한 베드신이 아니라, 감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촬영했어요. 마지막 베드신은 4일간 촬영했는데, 한국무용을 전공한 안무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세 칸의 방을 통과하면서 걷는 모습, 옷을 벗을 때도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서였죠. 노출을 두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는 작품 속 노출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노출에 대한 중압감은 훈훈한 촬영장 분위기로 위로가 됐다. 김대승 감독은 ‘친오빠’, 배우들끼리는 ‘삼남매’라 할 정도로 잘 통했다.
“서로 의지하면서 찍었어요. 진심으로 서로 애썼고. 같이 해서 너무 행복했고, ‘고맙다’는 말을 찍는 내내 달고 살았던 것 같아요. 감독님이 ‘한시도 눈을 못 떼고 배우들의 눈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몇 년동안 준비한 메시지가 잘 전달됐으면 해요.”
조여정은 촬영 후 혹독한 ‘앓이’를 겪고 있다고 한다. 기분 좋은 성장통이다. “지난 4개월간 쥐고있던 고민들이 없어지니, 보이는 것들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는 것. 하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가 좋아 흥행에 대한 기대감도 높다.
“여자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면 가장 기쁠 것 같아요. 작품을 고를 때 지금 여자들을 대변해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편이죠. 우리 영화는 뻔한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지 않아 많은 물음표를 던져주고 있어요. 내가 뭘 욕망하는지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죠. 인생의 파도는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언제 어떻게 올지도 모른다는 것, 궁 안의 삶이나 우리의 삶이나 닮았잖아요.”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진향희 기자 happy@mk.co.kr/사진=강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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