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행복, 이별=아픔으로 정형화된 공식은 그녀와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예쁜 포장지에 싸여 있는 사랑이라는 놈(!)의 징글징글한 실체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토해놨다는 게 더 가까운 표현이겠다.
그래서 오지은에게는 데뷔 초부터 ‘홍대마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2000년대 후반 들어 쏟아져 나온 ‘홍대여신’들로 인해 이제는 더 이상 홍대가 신전이 아닌(?) 시대가 도래한 반면, ‘홍대마녀’의 아우라는 여전하다. 아직까지 후계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그녀의 음악 세계가 그만큼 독보적이고, 또 공고해졌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녀가 모처럼 정규 앨범 ‘3’으로 돌아왔다. 2009년 2집 ‘지은’ 이후 무려 4년 만이다. ‘네가 없었다면’, ‘어긋남을 깨닫다’, ‘고작’, ‘사랑한다고 거짓을 말해줘’, ‘그렇게 정해진 길 위에서’ 등의 트랙리스트는 ‘물고기’, ‘겨울아침’까지 이어지며 사랑의 끝을 파고든다.
두 번의 ‘지은’을 거쳐 4년 만에 완성된 ‘3’은 오지은 ‘마녀(!) 3부작’의 완결편이다. 이번엔 제대로, 지난 사랑의 앙금을 끄집어냈다. 많은 이들이 지나간 사랑의 기억을 잊고 현재 혹은 다가오는 밝은 미래를 꿈꾸며 살면서 마음 한 편에 남아있는 상처를 꺼내놓기 조심스러운 반면, 오지은은 바로 그 지점에 꽂혔다.
“겉으로 보기에 저는 팝가수와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가끔 궁금해요. 홍상수 감독님은, 김기덕 박찬욱 감독님은 어떻게 늘 저런 것을 만들까? 감히 추측해보자면, 자기도 모르게 꽂히는 테마 같은 게 있지 않나 싶어요. 취향일 수도 있고. 저 같은 경우 가령 ‘화’,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같은 노래는 사랑의 정점에서 쓴 곡이었는데, 쓰고 보니 사랑의 그런 (불편한) 점을 그린 것이더라고요. 저는 그런 화제에 꽂히는 것 같아요.”
1, 2집을 내놓은 20대 후반의 거침없는 휘몰아치는 감정을 노래한 시기를 지나 30대 초반, 인간 오지은으로서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면서 한 번쯤 지난 짚고 넘어갈 필요도 있었다.
3집 발매 전, 오지은은 음악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슬럼프’를 경험했다. “1, 2집은 무언가 얘기를 안 하면 미칠 것 같은 게 있어서 뚝딱 써서 털어놨는데, 이번엔 뭐랄까 허공에 삽질 하는 것 같은? (웃음) 그런 걸 겪게 됐어요. 음악 하는 사람들 모두 겪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저는 비교적 늦게 찾아온 편이죠.”
녹음을 하고 공연을 할 때는 기쁘고 행복하지만, 음악을 한다는 것은 “괴로운 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작업”이다. ‘고작’ 역시 가사가 나오기까지는 무려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다.
“어렴풋이, 그런 가사를 쓰고 싶었어요. 이별의 순간, 실연에 괴로워하지만 그런 괴로움은 짧게 치고 빠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가령 20대의 모든 걸 걸었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존재였던 사랑이, 단지 그리워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랬던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 속에서 증폭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가 서있는 이 바닥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이 아닐까 싶었어요.”
오지은의 ‘고작’이라는 단 두 글자에는 이토록 깊은 심정이 담겨 있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 감정은 밑으로 밑으로 침잠한다. “가령 폭풍우라면 비 맞고 말리면 되거나 오두막에서 피하면 되지만, 이건 붕괴되는 느낌이더군요. 내 우주를 채웠던 사랑이 고작 이것 밖에 안 되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 “불편한 이야기를 계속 해왔다”는 그는 3집에 대해 “가장 불편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런데 가사가 써지지 않는 거예요. 저도 이제는 좀,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가 싶기도 했어요.”
결코 쉽게 대면하기 힘든 감정.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먼 곳에 홀로 앉아 끄집어 내놓은 메모 속에는 ‘고작’, ‘물고기’ 등에 담긴 이야기가 끄적끄적 적혀 있었다고. 평소 웹 서핑 등을 통해 접했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상흔에 관한 이야기와도 맥이 닿아 있었다.
“1, 2집은 남들이 뭐라 하든 내 생각을 써왔다면 3집은 내 생각 타인의 생각을 구분할 의미가 없었어요. 그동안 나만 생각하던 내가, 조금은 ‘우리’가 된 게 3집의 특성인 것 같기도 합니다.”
기대했던대로 이번 앨범은 여느 때보다 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여성성이 강한 이야기지만 꺼내어 놓기 껄끄러워 상대 남자에게 하지 못했던 그런 이야기. 그것이야말로 ‘진짜’ 이야기 아닌가. “언니는 계속 그 자리에서 그런 노래를 해줘야 한다”는 반응이 많다며 쑥스러워한다.
“의외로 남자 분들에게서 비밀 방명록이 굉장히 많이 와요. 아, 내 노래가 뭐랄까, 여자친구가 내 노래를 듣고 있는 걸 싫어하는 남자분들에게도, 공감을 주는 것인가 싶고요(웃음).”
팬들뿐 아니라 오지은의 이번 앨범에 대한 반응은 음악계에서도 뜨겁다. 고찬용, 서울전자음악단 신윤철, 디어클라우드 용린과 이랑, 스윗소로우 성진환, 랄라스윗 박별, 이상순, 이이언, 로다운30 윤병주, 정인, 린 등 쟁쟁한 선후배 동료들이 참여한 이번 앨범에 대해 오지은은 “은퇴해도 좋을 만큼”이라는 표현으로 만족감을 표하기도 했다.
무대 위 그리고 라디오 등 대중을 만나는 공간에서는 한결 같이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의외로 열정이 없고 게으르다 자평하는 오지은. 하지만 “아무 때나 80점 맞기 보다는 한 번을 하더라도 100점 맞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에서 매사에 임하는 진실된 태도가 엿보인다.
앨범을 내놓는 뮤지션에게 콘서트란 어찌 보면 일상의 스케줄이지만 또한 특별한 경험이기도 하다.
“공연 때마다 엔딩곡으로 ‘오늘은 하늘에 별이 참 많다’를 주로 선곡하곤 해요. 숨이 꽉꽉 막히는 노래를 하다가도, 그 노래를 불러주시는 팬들의 표정이 너무 좋아서 복받칠 때가 있어요. 마치 우리 할머니가 저를 바라봐주실 때의 표정처럼 너무나 맑은 미소로 노래를 불러주시는데, 이건 제가 음악 하는 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한 순간이에요. 음악을 하는 그 막막한, 가시밭길에서 제가 관객들에게 받는 선물이죠. 정말 고마운 선물이요.”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세연 기자 psyon@mk.co.kr/사진 해피로봇레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