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유지혜 기자] 배우 정진영은 스스로를 향해 ‘소리가 안 나는 배우’라고 표현했다. 제작발표회에서도, 수상소감을 말할 때에도 그는 자신의 앞에 항상 ‘소리가 안 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리 없이 강한 것들이 있다. 정진영이 주는 ‘묵직한 울림’이 바로 그 중 하나다.
정진영은 MBC 월화드라마 ‘화려한 유혹’에서 강석현이란 인물을 맡아 2015년 MBC 연기대상 특별기획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저처럼 소리가 안 나는 배우에 반응을 해주셨다”고 말했다. ‘소리가 안 난다’는 의미가 뭘까. 뒤늦게나마 그에게 그 의미를 물었다.
↑ 사진=이현지 기자 |
“사실 뭘 해도 반응이 크게 나오는, 인터넷 포털에 제 이름이 오르내리고 하는 배우가 아니다. 그런 저에 익숙한데 이번에 강석현이란 캐릭터에 정말 많은 반응을 보내주셨다. 고마웠고, 놀라웠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웃음) 가끔 유아인, 소지섭을 포기하게끔 만들었다는 애청자들의 응원이 있었는데 강석현의 멜로를 설득시켜야했던 저로서는 정말 다행이었다.”
극중 강석현은 딸의 친구인 신은수(최강희 분)에 빠져 결혼까지 한다. 자칫 이해할 수 없는 설정일 수 있는데, 정진영의 절절한 연기 때문에 그 설정이 ‘통했다’. 정진영 스스로도 “처음에 결혼을 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회차가 지나면서 감정이 점점 진해졌고, 결혼을 반대하는 주변 인물들의 대사가 섭섭해졌단다.
“말 그대로 멜로를 진하게 느꼈다. 원래는 냉철한 톤으로 연기를 했던 강석현이 조금씩 부드러워져 저도 혼났다. 감독님께서는 제가 어투가 바뀌어서 자연스럽고 좋다고 하셨지만.(웃음) 멜로가 깊어질 때마다 톤이 부드러워졌는데, 사실 이렇게 연기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거였다. 너무 달달해져서 간혹 ‘이게 강석현 맞나’ 싶을 때도 있었다.(웃음)”
↑ 사진=이현지 기자 |
캐릭터들의 치열한 심리전과 그 심리를 따라가며 극을 촘촘이 옭아맸던 ‘화려한 유혹’은 ‘명품 심리드라마’로 평가되곤 하지만, 초반에는 강석현과 신은수의 멜로와 강일주(차예련 분)의 악행이 ‘막장’으로 오해를 받을 만했다. 정진영도 제작발표회 때 “‘막장’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당분간 지켜봐줄 것을 당부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막장’의 기준은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하던 정진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막장’이란 단어를 잘 모르겠다. 이야기의 개연성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통속적’일 수밖에 없다. ‘당대적인’ 이야기라는 거다. 시청률, 더 넓은 시청자층, 방송심의 규정 등 당시의 많은 조건들을 고려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언가를 ‘막장’이라 평가하고 싶지 않다. 단지, 이 드라마를 선택할 때 충분한 개연성이 있고, 작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것 같다.”
↑ 사진=이현지 기자 |
‘화려한 유혹’은 캐릭터들간의 촘촘한 사연 전개와 심리전을 담은 대본도 좋았지만, 이를 설득력있게 그려낸 배우들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정진영은 극중 60대 후반을 연기해야 했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기억에 ‘시한부’ 선고를 받기까지 한다. 강석현에 대한 많은 고민이 필요했던 순간들이었다.
“물론 노년 연기를 해야 하는 것도 걸음걸이나 말투 등을 연구했다. 하지만 치매 선고를 받고 나서의 감정 연기에 더욱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속에서 느끼는 마지막 순간의 절박함이 무엇인지 느끼려고 노력했고, 그 순간에 아득함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영화 초반에 알파치노가 나온 ‘대니 콜린스’라는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 눈물나는 영화가 아닌데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그렇게 복잡한 감정을 지닌 연기가 좋다. 강석현도 그렇게 연기하고 싶었다.”
그는 무엇보다 동료 배우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했다. 특히 진형우 역을 맡은 주상욱이나 강일주 역을 맡은 차예련 등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을 전했다. 강석현의 멜로 감정이 진해지면서 후배들이 많이 당황했을 것이라며 그는 “참 어려웠을 거다”라고 말했다.
↑ 사진=이현지 기자 |
“신은수와 진혀우의 사랑이 크게 보여야 하는데 결혼도 내가 하고 진한 감정을 내가 가져가니 어리둥절했을 거다. 서운했을 법도 한데 열심히 연기하고 내색도 안 했다. 참 멋지고, 선하고, 스마트한 청년이다. 차예련은 천하의 악녀로 나오는데 참 힘든 일이다. 마음은 아마 많이 불편했을 거다. 갈수록 더욱 안정감 있게 악역을 해냈다.”
정진영은 “모든 배우들이 단체문자방을 만들어서 소통하고 ‘급번개’도 하면서 남다른 팀워크를 만들었는데 이런 게 저도 처음”이라고 말하며, 이런 튼튼한 팀워크가 50부작을 탄탄하게 지켜나간 비결이었다고 전했다. 배우들의 단합, 촘촘한 개연성이 ‘화려한 유혹’을 만들었고, 그 ‘화려한 유혹’ 안에서 정진영은 묵직한 또 하나의 ‘울림’을 전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정진영은 어떤 배우로 대중의 곁에 남고 싶을까.
“배우에게 있어서 영예로운 말은 ‘저 역을 저 배우가 해서 좋다’고, 굴욕적인 말은 ‘다른 배우가 했었어야 했다’다. 전자의 말을 듣고 싶다. 그동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게를 잡고 가는 역할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왕의 남자’ 때보다 더 감정을 드러냈다. 그래서 더 진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시청자들께서 하루의 피로를 푸는 ‘한 잔의 술’과 같은 드라마를 잘 즐겨주셔서 저는 그저 기쁠 따름이다.”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