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가 처음인가 아닌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야기할 지점이 무엇인가,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 제겐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배우 송강호(49)는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에 출연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내가 출연한 작품 중 제일 긴 제목은 공동구역JSA”이라며 “의도한 것도, 선호하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도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며 웃었다.
7일 개봉한 ‘밀정’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 사이의 숨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그린 스파이 첩보물이다.
시대적 배경이나 첩보를 다룬다는 지점에서 지난해 개봉해 1270만 관객을 동원한 ‘암살’(최동훈 감독)과 비교되곤 한다.
송강호는 “‘암살’을 재밌게 봤지만 다른 지점의 영화”라며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많은데 ‘밀정’만이 갖고 있는 시각, 지점들이 새롭게 다가왔다”고 했다.
그리곤 “그 시대를 경직되게 해석하는 게 아니라 ‘이정출’ 같은 회색분자들이 고뇌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통해 그 시대를 표현한 게 매력적이었다”고 덧붙였다.
송강호가 연기한 ‘이정출’은 ‘황옥’이라는 실존 인물을 극화한 캐릭터다. 하지만 “황옥의 일대기를 그리는 영화는 아니기에 크게 고민되진 않았다”고 밝혔다.
이병헌과의 작업은 “JSA의 초쿄파이 장면이 떠올랐다”며 감회에 젖었다.
“박찬욱 감독님도 JSA가 생각난다 하시더군요. 실제로 첫 만남이 비슷해요. 금기시되는 장소에 몰래 있다 갑자기 불현듯 닥치는 거죠. 서로 너무 당황해하는 표정, 지점이 비슷한데, 그 상황만 바뀐 거죠.”
송강호는 밀도 높은 이 클래식한 스파이물에서 서대문 형무소 장면을 베스트로 꼽는다. “그 장면엔 김지운 감독의 독특한 회화가 녹아 있다”고 소개했다.
“‘내가 고문한 여자가 죽었구나’ 해서 고통스러웠던 게 아니죠. 얼굴을 보여줄 수도 있고 얼마든지 자극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을텐데도 카메라가 직접적으로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손이었죠. 단순한 여성의 손이 아니라 가장 도움받고 잡아줘야 하는 손이라는 생각이 들죠. 우리 민족과 조국의 독립, 이런 상징성이 있다 생각돼요. 작은 손 하나 잡아주지 못한 몸부림, 그게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 ‘사도’에 이어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에 출연하게 됐다.
“하다보니 ‘밀정’ ‘사도’ ‘변호인’까지. 의도하는 것도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인 송강호는 역사를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많은데 ‘밀정’만이 갖고 있는 시각 지점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 시대를 경직되게 해석하는 게 아니라 이정출 같은 회색분자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살아왔나를 얘기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실존인물 ‘황옥’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그분의 일대기 영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생각한다. 단지 모델은 모델이다. 크게 고민은 안했으나 참조는 했다. 저희 영화가 허무맹랑한 영화는 아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고. 김장옥 열사(박희순)가 천명의 일경들에게 쫓기다 장렬히 전사했고. 기차 폭탄운반 사건도 실제로 있었다.”
--밀정 ‘이정출’의 마음이 한쪽으로 움직인 계기는 언제부터였다 생각하나.
“감독의 의도적인 장치였다. 악랄한 일제 앞잡이로 있다가 개연성이 있는 어떤 사건을 통해 변했다면 아마 매력이 떨어졌을 거다. 김장옥(박희순)을 죽이려고 할 적에 말리고 회유하고 설득한다. 의열단을 피신시킨 것도 이정출이다. 그때부터 혼란의 조짐을 보이지만 의열단원인 연계순(한지민)을 고문하고, 심지어 시신을 목도하게 되는 이 포인트가 이정출의 결심이나 삶의 방향이 틀어졌던 계기가 아닌가 싶다.”
--시사 후 영화 ‘암살’과 비교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암살’을 재밌게 봤지만 다른 지점의 영화다. 즉, 매력일텐데 이 영화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지점에 있냐는 거다. ‘이정출’로 대변되는 속을 알 수 없는, 고뇌하고 갈등하는 수많은 삶들을 통해 그 시대 아픔을 또 다르게 표현한다. (이같은 소재가 많아지는 것은) 한국영화 산업 자체가 질적 양적으로 그만큼 확장 발전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 전의 작품들은 한계가 있었다. 고증을 위해 많은 제작비가 들다보니 작은 얘기나 특수한 얘기에 매달릴 수 있었고. ‘암살’을 계기로 대중적으로 성공했다기 보다는 그 전의 한국영화들이 발전을 해오다 ‘암살’ 같은 영화를 태어나도록 한 것 같다.”
--숨 막힐 정도로 긴장을 고조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툭 하고 풀어버리기는 연기에도 능하다. 둘 다 배우 송강호의 장기인데 어느 쪽을 더 좋아하나?
“유머와 긴장을 계산하지 않는다. 우린 모두 희로애락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가장 슬플 때 느닷없이 자연 발생적인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한다. 배우로서 그런 감정을 좀 더 리듬감 있게 터뜨리는 것 같다.”
--스크린에서 주눅 들어 보일 때가 별로 없다. 그런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인가.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그 인물을 대하고 있나, 외적인 요소보다는 이 인물이 갖고 있는 본질이 뭘까를 생각한다.”
--공유가 “괴물 같은 선배”라고 표현했다.
“내가 괴물 같은 게 아니라 선배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을 할 때 한 선배가 후배들이 긴장하는 모습을 봤을 때 기분이 좋다고 했다. 예의를 갖추라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선배가 되니까 그 말이 많이 생각난다. 지금 만나고 있는 수많은 후배들이 긴장감을 가지고 있어 행복하다.”
--‘사도’에선 유아인과 ‘밀정’에선 공유와 호흡을 맞췄다.
“두 명 다 여름에 ‘천만’을 때리고 온 배우들이다. 두 배우의 에너지는 다르다. 유아인에겐 광기 어린 에너지가 있다면 공유는 부드럽고 맑은 에너지가 있다. 어느 게 세고 약한 개념은 아니다. 다들 정말 열심히들 한다. 강동원도 마찬가지고. 한 사람이라도 빼면 섭섭하다. 류준열은 내년에 얘기하겠다.”
--김지운 감독이 이번에도 께름칙한 상태에서 오케이를 했다고 들었다.
“시원한 적이 없었다.(웃음) 그런 상태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 오케이를 받으면 물론 쾌감은 있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 지론이 ‘세상에 오케이는 없다. 오케이에 가까운 게 있을 뿐이다’고 했다. 힘 빠지는 말이지만 그게 정답이라 생각한다. 오케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웃음) 오케이를 외쳐주면 자신감도 불어넣어주고 후배들은 좋아한다. 그걸 잘 하는 분이 이준익 감독이다. 이분은 너무 빨리 오케이를 많이 해서 ‘정말 오케이일까’ 신뢰가 안 생긴다. 하하!”
--지난해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또, 쉰을 넘기면서 달라지는 건 없나.
“만으로 49세다.(웃음) 세월을 붙잡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고단한 인생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제 개인의 삶보다는 평균수명도 늘고, 선후배들의 노력을 통해서 한국 영화계 배우들이 굉장히 두터워졌다. 후배 입장에서 그 노력한 결실을 받는 것 같다. 더 노력해서 후배들이 그런 결실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계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두터워지는 산업구조가 되는 것 같아 고무적이고 좋다. 90년대만 해도 청춘물 아니면 영화가 없을 정도였지 않나. 배우가 없으니 청춘물만 생산 됐는데 다양한 깊이와 다양성이 확보가 된다는 게 반갑고 고무적이다. 선배로서 어떤 형식이든 부담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작품을 선택하고 연기할 때 후배들이 예의주시하고 주목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건강한 부담감이라 표현하고 싶다. 짓눌리진 않지만 늘 그런 긴장감은 갖고 있다. 하지만 주변을 의식하는 타입은 아니다.”
--여유가 있을 땐 무엇을 하나.
“취미는 굳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집에 있으면 멍하니 앉아있고 복잡한 운동도 싫어한다. 귀찮은 게싫고, 걷기 아니면 작은 산 올라가고. 헬스 같은 게 너무 귀찮다.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야 하고. 게으른 건지.”
--심심할 땐 없나?
“왜 없겠나. 촬영이 없을 적엔 심심하다. 영화 얘기하고 촬영 얘기하는 게 가장 심심하지 않다. 술자리에서도 영화 얘기만 한다. 다른 얘기하는 게 너무 싫다. 찍고 있는 영화 얘길 하면서 스스로 정리가 된다. 생산적이기도 하고.”
--연출이나 각본 쓰는 것에 대해 관심은 안 생기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다재다능한 배우들을 보면 부럽다.”
--연기할 때 공들이는 모습에서 습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 사귈 때도 무심하다. 근데 유독 연기할 때만 집착한
--최근 가장 소소하게 행복했던 순간은.
“‘밀정’ 언배 시사를 끝냈을 때”
--극중 정채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꼭 다시 보세.”[ⓒ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