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돋우는 사회, 그야말로 분노가 넘치는 세상이잖아요. 이런 아픈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고 세태를 비꼬아 통쾌하게 비판하는 복수극은 워낙 많으니까. 그냥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어요. 우리도 모르게 잊고 지내거나 아예 잃어버린, 소중한 감정, 그 이상의 무엇을 떠올리면 좋을 텐데. 관객들이 잠시라도 아련한 감상에 젖었으면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웃음 짓게 만든다면 더 바랄게 없겠죠.”
강동원 주연의 감성 판타지 ‘가려진 시간’으로 관객들을 만나는 엄태화(35) 감독이 이같이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이어 독립영화 ‘잉투기’(2013) 이후 3년 만에 상업영화로 데뷔한 것에 대해 “‘행운’이란 말로 밖엔 설명할 길이 없다”며 겸손하게 말했다.
10일 오전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엄태화 감독을 만났다. 단정한 느낌에 선한 눈매, 조근조근한 말투와 진지한 표정, 왠지 모를 신뢰감을 주는 인상이다.
홍익대학교 광고디자인과를 졸업해 영화 아카데미에서 연출을 공부한 엄 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쓰리, 몬스터’(04) ‘친절한 금자씨’(05) 연출부를, 박찬욱 감독이 동생 박찬경 감독과 함께 연출한 ‘파란만장’(10)에서 스토리보드와 조감독을, 박찬경 감독의 ‘만신’(14) 스토리보드를 맡으며 경험을 쌓았다.
“이 영화가 아이들을 매개로 해 모든 장면이 유난히 예쁘고 착하게 보이지만 사실 잔혹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한 소녀, 그리고 소년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경험하고 세상이, 어른들이 부정하는 상황을 그들만의 ‘믿음’ 하나로 견뎌내는 이야기잖아요? 판타지로 ‘가려진 시간’을 만들고 모든 착한 장치를 동원해 아름답게 그려냈지만 사실 잔혹한 현실을 담았죠.”
엄 감독이 이같은 방식을 선택한 건 분노 해소나 자극이 아닌 작은 위로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세상을 알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믿음이나 순수함 등을 잃어버리는 대신 의심과 의혹, 불신 등의 감정들에 더 익숙해지죠. 그래서 이 힘든 세상을 더욱 우울하게 살아가게 되죠. 아주 작은 것 하나도 쉽게 믿기 힘든 이 세상에서 아이들의 동심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어요.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하게 만드는 ‘믿음’에 대한 걸요.”
확고한 신념과 자신만의 세계관, 다양한 경험으로 실력을 쌓아온 엄태화 감독은 2012년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단편 ‘숲’으로 만장일치 작품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 첫 독립영화 ‘잉투기’(2013)로 단박에 충무로 기대주로 떠올랐다.
엄 감독은 “캐스팅은 많은 행운 중 가장 감사한 부분”이라며 “시나리오 작업에서부터 머릿속을 지배한 강동원이라는 배우, 첫 연기임에도 불구 캐릭터와 완벽 싱크로율을 보여준 신은수의 조합은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고 만족해했다.
“왜 강동원이었냐고 묻는다면 그의 흥행력과 이미지, 여전히 소년 같은 비주얼이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에요. 어른이 된 성민이 현실로 돌아왔을 때 위화감을 주지 않는 배우는 단연 강동원 씨였죠. 사실 전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고 만든 거기에 꿈을 이루는 과정이었지만 강동원씨에겐 굉장한 모험이자 도전인데, 선뜻 손을 내밀고 자신의 속 얘기를 털어놓는 모습에서 대단하다고 여겼죠. 고마웠고 많이 의지가 됐어요.”
4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신예 신은수에 대해서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가능성이 많고 쿨한 성품이 인상적인 친구”라고 평했다.
“처음엔 굳이 새로운 얼굴을 찾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아이에서 숙녀가 되기 전인 과도기의 모습을 간직한 소녀의 이미지를 찾는 게 쉽지 않았어요. 은수 양의 얼굴엔 이야기가 있었고, 제가 찾던 그 이미지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어요. 훈련 2주 정도 지나니 기대 이상으로 잘 따라와줬고 확신이 들었죠. 이 친구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죠.”
끝으로 개봉을 앞둔 소감에 대해 물으니 “얼떨떨하고 잘 모르겠다”며 웃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기존보단 많은 관객들과 만난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책임감이 더 커진 건 사실”이라며 “많은 예산이 들어갔고, 함께 고생한 분들이 많아선지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은 당연히 있다. 손익 분기점은 꼭 넘었으면 좋겠다”며 하하 웃었다.
한편, '가려진 시간'은 화노도에서 일어난
오는 16일 개봉한다.
사진 유용석 기자/ kiki2022@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