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스크린에는 재난‧전쟁 등 극한의 위기 속에서도 기막힌 위기대처 능력을 뽐내며 ‘생명력의 끝’을 보여준 캐릭터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특히 태생적으로 타고난 능력을 보유한 해외 슈퍼 히어로완 달리 국내에는 평범한 듯 전혀 평범하지 않은, 강철 멘탈과 불굴의 의지로 악착같이 살아남은 생활형 히어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어린 딸을 지켜내기 위해 맨몸으로 좀비들과 싸우고, 뛰고 또 뛰어도 지치지 않는 무력 체력 ‘부산행’ 공유부터 오리지널 슈퍼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일제 식민지 아래 극명하게 나뉜 사상 속에서 혼란을 거듭하다 애국열사로 거듭나는 ‘밀정’ 송강호, 퇴근 길에 돌연 붕괴해버린 터널 속에서 소변까지 먹으며 초인적인 생명력을 보여준 ‘터널’ 하정우, 일본에서 건너온 나약한 듯 강렬한 악령, ‘곡성’의 외지인 쿠니무라 준, 역대급 파워를 자랑하는 마블의 히든카드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 컴버배치)까지.
국적과 나이, 직업, 태생, 능력치를 불문하고 참으로 다양한 히어로들이 관객들을 만났다. 이들 가운데 올해의 진정한 ‘히어로’는 누구인지 마음대로 순위를 매겨보았다. 평가 기준은 현실성‧위기대처 능력‧생존율‧친밀도‧관객동원(흥행) 총 5가지다.
*올해 흥행영화 순위- 1위 ‘부산행’(1천1백만), 2위 ‘검사외전’ (9백7십만), 3위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 (8백6십만), 4위 ‘밀정’ (7백5십만), 5위 ‘터널’ (7백1십만), 6위 ‘인천상륙작전’ (7백만), 7위 ‘럭키’ (6백9십만), 8위 ‘곡성’ (6백8십만), 9위 ‘덕혜옹주’ (5백5십만), 10위 ‘닥터 스트레인지’ (5백 4십만)*
(현실성-상, 위기대처능력-최상, 생존률-최상, 친밀도-최상, 관객동원-중*후보들 가운데*)
이런 짠내 나는, 원맨쇼가 또 있으랴. 삶에 대한 열망, 의지의 끝을 보여준 ‘터널’ 속 하정우가 [찐한 랭킹]이 선정한 올해 최고의 스크린 히어로다.
영화는 집으로 가는 길, 돌연 무너져버린 터널 안에 고립된 한 남자와 그의 구조를 둘러싸고 변해가는 터널 밖의 이야기를 그렸다. 신선하면서도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소재와 ‘원맨쇼의 달인’ 하정우의 조합이 돋보였던 작품. 특히 누구나 경험할 수 있을 법한 현실적인 상황, 위기를 그려 공감있게 다가왔다.
극중 하정우 역시 어떤 타고난 능력이나, 특별한 직업군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는 갑작스러운 위기 속에서 구조대를 기다리며 고통과 공포를 이겨내려고 노력하지만, 이내 늘어지는 구조 작업에 절망과 포기를 반복한다. 결국 가족을 생각하며 스스로 살 길을 찾는다.
위기 속에서 수없이 변화하는 굴곡진 감정선,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강렬해지는 삶에 대한 열망. 하정우는 이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위기의 극복 과정 역시 비교적 현실적으로 담긴다. 그는 부족한 생수에 급기야 소변을, 아이를 위해 준비한 케이크를 식량 삼아 처절한 생존기를 보여준다.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할 것 같은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고 찬란한 일상의 기쁨을 만끽하는, 진정 위대한 인물이다.
(현실성-상, 위기대처능력-상, 생존률-최상, 친밀도-상, 흥행-중상)
친일파냐, 독립군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비극의 역사를 짧은 글로 배운 우리에겐 매우 간단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 당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하루아침에 결정하고 그 이념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기란 너무도 힘든 일이었을 테다.
소신 하나로, 나뿐만 아니라 나의 친구, 가족이 위험에 처하고 평생을 도망자 신세로 살아 가야한다. 배고프고 뭐든 부족한 현실 속에서 ‘애국’이라는 이상향을 지키며 모든 걸 희생한다는 게 누구에게나 당연할 리가 있을까.
‘밀정’ 속 송강호는 이같은 혼란의 시대를 살면서 수없이 갈등하는 인물을 밀도 있게 그려간다. 일제강점기 아래, 국적을 떠나 자신을 믿어주고 인정해주는 일본 장군의 밑으로 들어가 일본 정보국에서 일하는 그는 매국노다. 그런 그가 임무 수행을 위해 동포들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심적 동요를 맞이하고 점차 독립투사로 변모해가는 과정은 꽤나 공감 있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어쩔 수 없이, 극단화된 이념 아래 자신의 신념을 선택해야 하는 시대이지만 태어나서부터 정해진 독립군이란 없다. 독립군 집안에서 태어난 자제라고 해서, 친일파 자손이라고 해서(지대한 영향을 받긴 하겠지만) 그 인생을 단언할 순 없다.
영화는 이 같은 현실을 섬세하게 반영하고, 송강호는 그 안에서 점차 강인한 독립투사로 변해간다. 오래 또 멀리 돌고 돌아서 왔지만, 명확한 명분과 자기 확신 끝에 내린 결정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현실성-중하, 위기대처능력-중, 생존률-상, 친밀도-중상, 흥행-중하)
난생 처음 접하는 악역, 아니 악령이다. 영화 ‘곡성’에서 외지인(쿠니무라 준)은 영화의 중심인물이며, 그 안에는 여러가지 캐릭터들이 차용돼있다. 극중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어떤 것 하나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그는 여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함과 나약함으로 관람 내내 ‘정말 악마가 맞나’라는 의심을 들게 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외지인의 존재가 "귀신인지,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은 수없이 등장하고,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묻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한번도 속시원히 말로 풀어지지 않고, 오로지 장면으로만 묘사된다.
작품 속에는 이 외지인의 존재가 무엇인지 나타내기 위한 장면이 수차례 등장하는데 흥미로운 건 그가 ‘분명히 귀신(악마)’이면서, ‘분명히 사람’이라는 점이다. 새빨간 얼굴에 새빨간 눈으로 변해 얼굴을 파묻고 발톱과 이빨로 고라니의 생살을 뜯어먹는 장면에서 외지인은, 도저히 사람일 수 없는 분명한 귀신이다.
하지만 종구와 친구들에게 쫓겨 산을 도망다니고, 절벽에 매달려있다가 떨어져서 손으로 입을 막고 우는 장면은 또 사람이다. 관객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혼란을 느끼면서 작품에 더 깊이 빠져든다. 결국 그는 마지막 강펀치로 숨겨왔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반전의 끝을 선사한다.
(현실성-중하, 위기대처능력-상, 생존률-하, 친밀도-중, 흥행-최상)
평범한 남성이지만, 부성을 머금은 남잔 강했다. 깊은 모성만큼이나 강인한 부성으로 좀비와의 사투에서 딸을 지켜난 공유 역시 이름을 올렸다.
‘부산행’은 서울역에서 의문의 바이러스가 시작된 가운데 부산으로 가는 KTX에 올라탄 생존자들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대전, 대구 등 실제로 부산을 가기 전 지나치는 중간역이 나타날 때마다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며, KTX의 빠른 속도처럼 속도감 넘치는 좀비와의 사투가 긴장감을 일으킨다.
작품 속에서 좀비는 일종의 재난으로 그려진다. 무분별한 개발 속에서 빚어진 재앙으로 환경 문제가 심각한 현대 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언젠가 비슷한 형태로 일어날지도 모를 거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구체적인 상황으로 그려진다.
열차 안에 퍼진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공유는 사랑하는 딸과 다른 칸에 놓이게 된다. 그는 열차 속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야구방망이를 들고, 혹은 맨손으로 딸을 향해 진격한다.
공유는 극중 펀드매니저로 가정보다 성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미투자자들의 피해는 생각하지 않는 다소 이기적인 인물이다. 의문의 바이러스가 퍼지자 자신과 딸 수안만 피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은 전혀 고려하지 않던 그이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면서 점차 따뜻한 인물이 되어간다. 좀비와 맞
이하 <5>위와 <6>위는 이 시국에 우리나라에 필요한, 하지만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리더 캡틴 아메리카와 엄청난 능력치를 지녔지만 역시나 전혀 현실감이 없는 마블의 뉴히어로 닥터스트레인지가 각각 차지했다.
kiki2022@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