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지난 2011년 10·26 재보궐 선거로 돌려볼까요?
당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 이사와 안철수 서울대 교수는 무소속으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박 이사장은 겨우 5%의 지지율, 그리고 안철수 교수는 5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 이사장이 지리산에서 내려와 안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대담하게 후보를 양보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5% 후보가 50% 후보에게 양보해 달라니요?
그런데 안철수 교수는 요즘 말로 쿨하게 후보직을 양보했습니다.
▶ 인터뷰 : 안철수 /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2011년 9월6일)
- "저에게 보여주신 기대 역시 온전히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리더십에 대한 변화의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 여깁니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 선거 출마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인터뷰 : 박원순 / 희망제작소 상임이사(2011년 9월6일)
- "좋은 세상,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기 힘든 이런 결론을 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9월6일의 양보는 박원순 시장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빚으로 남게 됩니다.
박 시장은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요즘 안철수 의원은 주변 동지를 모으느라 분주합니다.
기존 정당에 물들지 않고, 안철수식 새 정치- 그게 뭔지는 여전히 모호하지만-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특히 요즘 민주당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야권의 주도권 다툼을 벌일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럴 때 안 의원으로서는 박원순 시장이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 의원 역시 내심 박원순 시장과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안 의원은 지난 3일 기자들과 만나 박원순 시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인터뷰 : 안철수 / 무소속 의원(6월3일)
- "박원순 시장은 새 정치를 하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새 정치를 큰 화두에서는 지향점이 같아서 충분히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손을 잡는다는 게 어느 선일까요?
박 시장이 당장 내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을 나와 안철수 신당 소속으로 선거에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뜻일까요?
적어도 이런 가능성은 아주 희박한 것 같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민주당을 탈당할 뜻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 인터뷰 : 박원순 / 서울시장
- "제게는 정치적으로 고도의 계산을 할 능력이 없다. 민주당 소속인 만큼 민주당으로 선거에 나가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박 시장은 안철수 의원과 협력의 길도 당연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협력의 길도 안철수식 협력이 아니라 민주당 식의 협력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 인터뷰 : 박원순 / 서울시장
- "안철수 의원도 새 정치에 대한 국민의 소망을 담지하고 계신 분이니 서로 경쟁이 있을 순 있지만, 크게 보면 야권이고 기본적으로 협력관계이다. 제가 그런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
안철수 의원은 자신을 중심으로 민주당 세력이 옮겨오는 협력을 꿈꾸고 있다면, 박원순 시장은 아무래도 민주당 중심의 협력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서로 생각하는 협력의 구심점이 다르다면, 그 협력은 경쟁 관계로 바뀔 수 있습니다.
바로 안철수 의원과 박원순 시장이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김한길 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민주당 사람들 상당수는 박원순 시장은 잠재적인 대선 주자로 꼽고 있습니다.
안철수 의원을 상대할 카드로 말입니다.
지금 박원순 시장은 2년 전 5%의 지지율을 보이던 박원순이 아닙니다.
내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가장 강력한 당선 후보에 꼽힐 정도로 어느새 거물 정치인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안철수 의원과 5년 뒤 대선에서 맞붙는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정도입니다.
반면, 안철수 의원도 2년 전의 안철수 교수가 아닙니다.
지난 대선 출마로 정치적으로 거물이 됐고, 그 힘은 지난 서울 노원병 재보궐선거에서 입증됐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완벽하지 않습니다.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는 원망의 눈빛이 여전히 남아 있고, 독자세력화 또는 신당 창당의 구조적 한계를 현재 체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안 의원은 현실 정치가 뭔지를 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민생정책토론회를 열어 안철수식 새 정치를 보여주려 했는데, 엉뚱하게 민생을 모른다는 망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 인터뷰 : 김진택 / 농심특약점 대리점협의회 대표
- "이거 얼마인지 아세요? 모르세요? (천 원….) 천 원이요? 서민들이 매일 먹는 겁니다. 안철수 의원님 모르세요? 이젠 아셔야 합니다. 국회에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박원순 시장이 서민의 삶을 파고드는 민생 정치를 통해 우뚝 섰다면, 안철수 의원은 민생과 동떨어진 공자님 말씀만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5% 지지율을 보인 박 시장이 치고 올라오고, 50%인 안 의원이 주춤한다면 두 사람은 이제 대등한 관계가 됐다고 볼 수 있을까요?
박원순 시장은 '안철수 의원에게 정치적으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갚겠다'고 했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박 시장한테 받을 빚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서로 선의의 말들이 오간 것이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묘한 견제 심리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을 경쟁시키려는 것은 두 사람의 뜻이라기보다는 언론의 부추김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박원순 시장의 말처럼, 우리나라 정치라는 게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경쟁자 적 관계로 가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을까요?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영상편집 : 신민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