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참으로 명예로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명예가 퇴임 후까지 이어진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어제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택을 압류하고, 친인척의 회사 등을 압수수색했습니다.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하고 하수구까지 뒤졌습니다.
돈이 있는데도, 추징금을 내지 않았을까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7시간에 걸친 수색 끝에 검찰은 1억 원 상당의 그림을 비롯해 150여 점의 미술품과 도자기 등을 갖고 나왔습니다.
수색이 진행되는 동안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는 집안에 있었습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 인터뷰 : 전두환 전 대통령
- "수고가 많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런 일을 보여서 국민에게 면목이 없다."
이순자 여사는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져온 자개장에 빨간 압류 딱지가 붙여지자 울먹울먹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면목이 없다'는 전 전 대통령의 말처럼, 추징금을 걷기 위해 역대 대통령의 집을 압류하고 자식들 회사를 압수수색하는 장면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만큼 면목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왜 이 지경까지 됐을까요?
추징금 1,672억 원을 다 내지는 못하더라도, 숨겨 놓은 재산이나 자식들에게 준 재산을 회수해 그나마 양심껏 추징금을 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29만 원 밖에 없다면서도 해외 여행을 가고, 골프를 즐길 게 아니라 조신하게 지냈으면 어땠을까요?
▶ 인터뷰 : 전두환 / 전 대통령(2010년 10월)
- "열심히 운동하고 밥 잘 먹고…"
민주당이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재산은 1조 원에 달합니다.
검찰이 이 가운데 얼마를 환수할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그러나 검찰이 집에 들이닥친 순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더는 국민 낯을 볼 수 있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명예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됐습니다.
82세의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는 걸까요?
서글픈 일입니다.
퇴임 후 존경받지 못한 대통령을 보는 것도 서글프지만, 임기 중 그 권력이 흔들리는 것을 보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 7개월이 지났는데, 갑자기 '대선 불복'이라는 말이 정치권에 회자하고 있습니다.
국정원 선거개입과 관련한 민주당의 장외투쟁,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대선 불복' 차원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의 말입니다.
▶ 인터뷰 : 이정현 / 청와대 홍보수석(7월15일)
-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건 대통령을 뽑은 국민에 대한 도전입니다. 대선에 대한 민주당의 견해를 밝혀야 합니다."
청와대가 이런 의구심을 품은 데는 이해찬 민주당 고문의 말도 빌미가 됐습니다.
이 고문의 말입니다.
▶ 인터뷰 : 이해찬 / 민주당 고문
- "국정원과 단절하고 공정한 나라 만들어 달라. 그래야 당신(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이 유지된다. 자꾸 미워하고 거짓말하면 [당선 무효]까지 주장하는 세력이 더 늘게 된다."
박 대통령을 '당신'이라 칭하고, '당선무효' 세력이 늘게 된다는 말이 청와대로서는 쾌 불쾌하게 들렸을 법합니다.
청와대가 강한 의구심을 품자, 민주당은 서둘러 진화에 나서며 반격했습니다.
▶ 인터뷰 : 김한길 / 민주당 대표(7월17일)
- "민주당은 대선에 불복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은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망가뜨리는 비정상적인 국정운영에 불복하는 것이다."
대선 불복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나서서 '친노 세력'을 겨냥했습니다.
▶ 인터뷰 : 최경환 / 새누리당 원내대표
- "김한길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대통령의 정통성과 대선에 불복하는 것이 아니다고 분명히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내 친노 세력 중심으로 일부 세력들이 불복하는 듯한 발언이 계속 나오는 것에 대해 심히 우려를 표시합니다."
민주당 지도부와 친노 세력을 떼어놓는 동시에 NLL과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를 강하게 밀고 나오는 친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어쨌든 이런 '대선 불복' 논란은 국민 눈에 그리 좋게 보일 리 없습니다.
'대선불복'으로 비치도록 빌미를 준 쪽이나,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쪽이나 어느 쪽도 환영받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 초반에는 늘 이런 식의 '대선 불복'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초 '총선 개입' 발언으로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 인터뷰 : 박관용 / 국회의장(2004년 3월12일)
- "투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석 195표 중 가 193표, 부 2표로 헌법 제65조에 의해 탄핵안이 가결됐음을 선언합니다."
이 표결로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잠시 떠나야 했습니다.
이런저런 맥락을 다 처치하고서라도 당시 이런 탄핵의 밑바닥에는 '대선 불복'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이명박 정부 초기 때 전국을 뒤덮었던 촛불 시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촛불 시위 그 자체의 논란 여부를 떠나, 이명박 대통령을 받아들일 수 없는 '대선 불복'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시각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당시 이 대통령의 얘기를 들어보죠.
▶ 인터뷰 : 이명박 대통령(촛불시위 대국민 사과)
- "캄캄한 산 중턱에 혼자 앉아서 시가지를 잔뜩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저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국민과 소통하면서 국민과 함께 가겠습니다. 국민의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반대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탄핵이나 촛불시위가 '대선 불복'의 연장선상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대선 불복'은 우리 정치 문화의 독특한 현상일까요?
양당제인 미국 역시 치열한 대통령 선거를 치르지만, '대선 불복'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바마 대통령과 그 경쟁 상대였던 부시 전 대통령의 얼마 전 대화입니다.
▶ 인터뷰 : 버락 오바마 / 미국 대통령
- "우리 모두를 대신해, 미국은 당신 덕분에 더 친절하고 좋은 나라가 됐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 인터뷰 : 조지 H W 부시 / 전 미국 대통령
- "백악관에 와서 최고의 환대를 받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보고 느끼는 게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선거가 끝났는데도 대통령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 퇴임 후 압수수색을 당하는 대통령.
이런 모습을 더는 보지 않을 날이 올까요?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영상편집 : 신민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