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목은 내년 예산안 처리에 대한 국회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지만, 여야 정치권과 국민의 눈은 박 대통령이 꼬인 정국을 풀 정치적 제안을 야권에 던질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바로 국정원 선거개입 논란과 대화록 논란을 말하는 겁니다.
박 대통령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
- "최근 야당이 제기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포함해 무엇이든 국회에서 여야가 충분히 논의해서 합의점을 찾아주신다면 존중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국회에서 여야 간에 합의해주신다면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여야가 합의한다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야권이 주장하고 있는 국정원 선거개입과 회의록 유출 논란에 대한 특검 도입도 가능하다는 뜻인까요.
물론 여야 합의라는 전제가 붙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박 대통령의 시정 연설로 얼어붙은 정국이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섣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 시정 연설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야당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 인터뷰 : 유일호 / 새누리당 대변인
- "그동안 야당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주장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됐을 것이다. 진정성 있는 설명과 소통을 강조하는 간절함이 배어있는 시정연설이었다"
▶ 인터뷰 : 김한길 / 민주당 대표
- "말씀은 많았지만 정답은 없다. 미지근한 물로 밥을 지을 수는 없다"
민주당은 박 대통령이 국회에 들어설 때부터 냉랭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보낸 것과 달리, 민주당 의원들은 자리에 앉은 채 박수를 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항의 표시로 20여 명의 의원은 아예 불참했고, 일부 초선 의원들은 연설 중에 퇴장하기도 했습니다.
국회에서 단식 농성 중인 통합진보당 의원들은 검은 넥타이에 마스크를 쓰고 침묵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심지어 박 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국회를 빠져 나간 뒤 민주당 의원들과 청와대 경호원 사이에 물리적 충돌까지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 시정 연설 뒤 민주당 의원들은 국회 본관 계단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여기 참석하려 본관을 나서던 강기정 민주당 의원이 경호용 버스 3대가 본관 정문 앞에 여전히 세워진 것을 보고 차를 빼라고 항의했습니다.
강 의원이 버스 한 대의 출입문을 발로 찼고, 이에 경호진 한 사람이 강 의원의 뒷덜미를 잡으면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주변에 있던 민주당 동료 의원들이 경호진에게 강하게 항의했고, 다른 경호 인력이 순식간에 모여들면서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호진이 강 의원 머리에 얼굴을 부딪혔고, 이 경호원은 얼굴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지금의 정국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시정연설은 이렇게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1988년 처음 국회 시정연설을 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겠다고 공언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회의장의 시정연설 요청을 거부해 국회 하대 논란이 있기도 했습니다.
가장 화제를 모았던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정연설입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10월13일 시정 연설에서 "대통령 직을 내놓을 각오가 돼 있다"며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했습니다,
자신의 최측근인 최도술 청와대 전 비리사건과 관련해서였습니다.
38분에 걸친 노 전 대통령의 시정연설에는 단 한 차례의 박수도 나오지 않았고,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 반발하며 정국이 혼란 상태에 빠졌습니다.
재신임 투표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훗날 탄핵사태까지 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은 그해 4월 첫 시정연설에서 국정원과 검찰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인터뷰 : 노무현 전 대통령(2003년 4월2일 시정연설)
- "이제 대통령의 초법적 권력행사는 없을 것입니다.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이른바 권력기관을 더 이상 정치권력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권력기관을 국민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7월 국회 시정 연설을 했는데, 당시 민주당 의원들은 빨간 넥타이와 머플러를 매 항의의 뜻을 표했습니다.
▶ 인터뷰 : 이명박 전 대통령(2008년 7월)
- "국민의 목소리에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는 한편, 법치의 원칙을 더 굳건히 세워나가겠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약속했지만, 하필 그날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격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 전 대통령의말과 달리 남북 관계는 경색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대부분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보다는 여야 정국 대치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오늘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과연 어떨까요?
박 대통령이 국회에 화해 제스처를 보냈지만,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는 여야의 셈법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차이보다 더 큰 것은 정치권이 이제 그만 지난 대선 후유증에서 벗어나라는 민심의목소리입니다.
박 대통령의 시정 연설만큼이나 그 목소리가 오늘 여야 정치인들에게도 들렸으면 합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