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에 테러를 가한 김기종 우리마당독도지킴이 대표(55)의 정체와 범행 동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씨는 원래 돌출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을 많이 해왔다는 것이 김씨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이다. 실제 김씨의 5일 아침 범행과 같은 극단적 행동은 처음이 아니다. 먼저 2007년 10월 19일에 청와대 앞에서 1988년 발생한 ‘우리마당 습격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던 중 분신을 시도해 전신 39%에 화상을 입기도 했었다. 또 2010년 7월 7일에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특별강연회 도중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당시 일본 대사에게 지름 약 10㎝와 7㎝ 크기의 시멘트 덩어리 2개를 던진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김씨를 대학시절부터 잘 알고 있다는 유은혜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은 “이 분이 워낙 개인적인 돌출행동을 많이 하던 분”이라면서 “그러다보니 활동 하는데 대한 신뢰감을 충분히 주지 못하고 지지를 받지 못해 어려움도 겪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대변인은 이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기종씨의 동생 기창씨도 매일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5~6년 동안 가족들과 전혀 왕래가 없어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몰랐다”면서 “옛날부터 민족·민주 이런 얘기 많이 했는데 ‘먹고사는게 중요하지 무슨 소리냐’고 말하는 가족들과는 이해가 깊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어 “형이 북한과 관계가 있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김 씨는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80학번으로 사법시험 응시를 포기한 이후 80년대 초반부터 재야 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2년부터는 ‘우리마당’이라는 단체를 주도해왔는데 이 단체는 민족민중문화를 발굴하고 대중화하기 위한 운동을 하던 조직으로 알려져있다.
민족문화운동에 더해 독도지킴이를 자처하던 김씨는 2006년에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자 동료 6명과 함께 본적을 경북 울릉군 독도리 38번지로 옮긴 바 있다. 등록지가 38번지가 된 것은 38선으로 인해 분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김씨 본인이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원래 남 북 통일을 대비한 민족문화 운동에 집중해온 김씨는 2006~2008년 통일교육위원(통일부장관이 위촉)으로 활동하면서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8차례에 걸쳐 개성을 방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통일부 관계자는 “통일교육위원의 전체 수는 약 1100여 명 수준이고 당시는 방북이 특별한 이력은 아니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범행 동기와 관련해서는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남북관계를 얼어붙게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 한규범씨는 “김씨를 2~3주 전에 만났을 때도 그가 오바마의 대북 정책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다”고 전하며 전통문화를 넘어 반미, 특히 한미 합동 군사훈련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실제 김씨는 2일 페이스북에 “키리졸브훈련과 독수리훈련의 문제점은 심각하다”며 “전쟁연습을 중단하면 남북대화가 재개될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남기기도 했고 경찰서에서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전쟁을 반대한다”면서 “전쟁연습 때문에 이산가족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외치기도 했다.
공안당국도 반일활동에 주력했던 김씨가 수차례 방북 이후 반미활동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고
[김성훈 기자 / 최희석 기자 / 조희영 기자 /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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