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제도’와 ‘문화’의 상호 작용이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제도는 존재하지 않고, 한국 정치인들이 갑자기 북유럽과 같은 성숙한 정치 문화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를 진흙탕에서 끌어내려면 제도 변화를 통한 ‘방아쇠 효과(Trigger Effect)’가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다.
미래정치 50년 자문단은 이번 총선이 방아쇠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문했다.
4·13 총선에서 각 정당의 최우선 공약은 ‘국회 개혁’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식물국회를 초래한 국회선진화법의 개선책은 물론 현행 정치관계법 개혁 방안도 내놓아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선거구제 개편,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재편까지 정당별 청사진을 내놓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국회 개혁 놓고 與野가 경쟁하라
19대 국회는 그 동안 저조한 법안 처리율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지난 1월 말까지 법안처리율이 40.9%에 그쳐 17대 국회(50.3%), 18대 국회(44.8%) 등에 비해 낮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여야가 전혀 관련없는 법안을 상습적으로 연계 처리하는 데 있다. 정부나 여당이 제출한 법안 가운데 우선순위가 높은 경우 예외없이 야당이 다른 법안과 연계처리를 요구했다. ‘끼워팔기’, ‘법안 바터’라는 용어가 신문 지면에 난무했다. 19대 국회가 저생산성의 늪에 빠진 것은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이라 불리는 개정 국회법이 결정적 원인이다. 국회 스스로 채택한 ‘초다수결’ 제도는 폭력 국회를 막겠다는 선한 취지와 달리 어느 한 당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 국회가 올스톱되는 참극을 초래했다. 다수결 원칙은 사라지고 거대 정당간 합의만이 법안 처리를 위한 유일한 통로가 됐기 때문이다.
박재완 성균관대 교수는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에 대해 적극적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야당이 선진화법 폐기를 역으로 제안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야당이 향후 집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통 크게 결단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불어민주당은 영원히 야당으로 머물 작정이 아니라면 국가 전체의 효율성과 국민 불신을 감안해 20대 총선에서 국회 개혁 방안을 공약으로 내걸어야 할 것이다. 새누리당과 국민의당도 마찬가지다.
◆의원 국민소환제·성과평가제 도입을
국회의원의 가장 큰 특권은 ‘웬만하면’ 금배지를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거법 위반에 따른 당선무효, 유죄 판결의 확정, 제명 등의 경우에만 의원직을 잃는다. 선거철을 빼면 정치인들이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다.
이에 비해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들은 주민소환제 대상이다. ‘국민소환(Recall)’이란 투표권을 행사한 유권자들이 무능력한 대리인을 수시로 교체하는 제도다. 대통령조차 탄핵소추의 대상이지만 국회의원만은 예외다.
지난 2012년 황주홍 의원이 ‘국회의원의 국민소환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소관 상임위원회는 4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심사하지 않았다. 여야 모두 국회의원 특원 내려놓기의 일환으로 소환제 도입을 주장하더니 ‘말의 성찬’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임금체계도 전면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 근로자들은 성과 측정에 따라 차별화된 임금을 받고 일한다. 반면 연간 1억4600만원, 보좌진 임금을 합하면 의원 1명당 6억원을 받는 국회의원들은 잘하나 못하나 차이가 없다.
지금처럼 성과 측정이 불가능한 구조에선 의원들이 의정 활동에 주력할 유인이 적다. 재선을 위해서는 중앙정치 무대보다는 지역구 관리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이제라도 의정활동 평가 시스템을 재정비해 국회의원 활동의 중심을 행정부 감시와 입법 활동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중립적 인사로 구성된 외부 독립기구가 국회의원 평가 기준을 촘촘히 만들고, 이에 따른 보수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도록 해야 한다. 법안 발의 횟수 등 정량적 평가 뿐 아니라 사회적·재정적 영향 등 정성적 평가까지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정감사를 통한 행정부 감시, 사회적 갈등 조정 등도 다층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중·대 선거구제로 승자독식 구조 깨야
19대 국회는 한국 정치사에 또 하나의 치욕을 남겼다. 국회는 헌법재판소 판결을 어긴 채 20대 총선에 적용할 선거구 획정을 법적시한 내에 처리하지 못했다. 여야 정쟁 탓이지만 소선거구 제도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소선거구제는 하나의 선거구에서 한 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제도다. 지역주의에 기반한 거대 정당들이 의석을 분점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 영호남에선 당내 공천만 받으면 되니 계파 보스에게 줄만 서면 되는 정치문화가 생겨났다. 소선거구제 하에서 국회의원들은 국가의 ‘전체이익’이 아니라 지역구의 ‘부분이익’에 함몰될 수 밖에 없다. 1987년 직선제 개헌 투쟁을 통해 대통령 5년 단임제와 함께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라는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국선거학회장을 지낸 김욱 배재대 교수는 “선거구 획정 난항, 사표(死票) 문제, 정당 득표율과 의석 수의 불일치 등 소선거구 제도로 인한 폐해를 충분히 경험했다”며 “하나의 지역에서 득표율에 비례해 여러 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승자독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승자독식 구도에서 벗어나면 포퓰리즘 공약 대신 건전한 정책 경쟁을 위한 모판
도시 인구의 증가 추세도 피하기 어렵다. 소선거구 제도를 고집하면 선거구 획정 논란이 4년마다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만 농어촌은 인구 수를 고려해 소선거구 제도를 유지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기획취재팀 = 신헌철 차장 / 김명환 기자 / 박의명 기자 /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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