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더민주 대표가 신의 한 수를 뒀습니다.
국민의 당과 통합을 제안한 것입니다.
김종인 대표의 말입니다.
▶ 인터뷰 : 김종인 / 더불어민주당 대표
- "야권에 다시 한 번 통합에 동참해달라고 제의를 드린다. 시간이 없다. 각자의 이기심에 집착하지 말고 민주정치 발전을 위해 야권 승리를 가져오고 내년 대선에서의 정권 교체를 이루기 위해 야권이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이 제안은 왜 신의 한 수일까요?
오늘은 더민주가 필리버스터를 끝낸 날입니다.
의원총회에서 난상토론 끝에 필리버스터를 끝내기로 했지만, 그 후폭풍은 간단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당장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 단체들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한 김 대표와 더민주에 대해 강한 배신감과 비판을 토로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하루 종일 이 비판의 목소리가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 들끓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김 대표의 '통합' 제안으로 이 비판의 목소리가 쏙 들어가버렸습니다.
야권의 관심은 필리버스터를 중단한 것에 대한 비판과 논란보다는 야권 통합이라는 지상명령으로 급속히 옮아갔습니다.
필리버스터 중단으로 지지자들로부터 지지율을 잃을 뻔했던 김종인 체제가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 듯한 느낌입니다.
통합 제안이 신의 한 수인 두 번째 이유는 국민의 당을 사면초가로 몰아넣었다는 겁니다.
야권 통합 내지 연대 없이는 수도권에서 이길 수 없고, 결국 총선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호남에서 사실상 원수 사이가 된 두 당이 수도권에서만 정략적으로 연대한다는 것은 국민이 보기에 모양새도 좋지 않고, 실현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야권 지지자들이 통합을 간절히 바라는 이유입니다.
안철수 대표는 멀리 대권을 내다보기에 연대는 없다고 천명하고 있지만, 8%까지 떨어진 당 지지율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 국민의 당 후보들은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통합이나 연대를 통해 당장 이번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김 대표의 통합 제안은 '야권 통합'이라는 대의명분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안철수 대표와 후보들의 사이를 벌리는 이중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당장 안 대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 인터뷰 : 안철수 / 국민의 당 공동대표
- "지금 이 시점에 그런 제안을 하는 의도가 의심스럽다. 먼저 당내 정리부터 하기 바란다"
안 대표 측은 통합 제안이 김 대표의 '사술'이라고 주장하면서 당 내부를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안 대표의 생각과 다릅니다.
김한길 상임공동선대위원장은 "진의를 좀더 정확하게 알아보겠다"고 말을 아꼈고, 천정배 공동대표는 "경솔하게 답변해선 안될 일"이라고 즉답을 피했습니다.
강하게 반발하게 아니라 신중한 모드를 취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통합의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것 아닐까요?
심지어 안 대표의 비서실장까지 지낸 문병호 의원 역시 "우리가 탈당한 취지는 더민주의 친노(친노무현)·운동권 패권주의, 낡은 진보 이미지 때문이었다"며 "더 과감하게 변화한다면 야권 통합이나 연대를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벌써 내분이 생긴 모양새입니다.
후보 등록까지 남은 20일 동안 국민의 당은 통합제안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안 대표와 다른 의원들간의 치열한 갈등과 내분이 피어날 것입니다.
김 대표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이런 시각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난 만큼 국민의 당이 일사불란한 대오로 총선을 치르기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더 민주로서는 통합이 되면 국민의 당을 흡수하는 형태니 더 좋고, 통합이 되지 않더라도 국민의 당을 흔들어놨기 때문에 손해 본 장사는 아닌 듯합니다.
국민의 당이 야권 통합을 반대하면 총선 승리를 바라는 야권 지지자들, 특히 수권 세력을 기대하는 호남에서 더 외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김 대표 측근의 말을 들어보면, 김 대표는 통합을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고 합니다.
즉흥적인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필리버스터를 끝낸 날, 국민의 당 지지율이 갈수록 추락하는 순간을 김 대표는 '통합제안'의 타이밍으로 잡았습니다.
정치가 타이밍이라면 김 대표는 그야말로 '여의도의 책사'라 불릴 만합니다.
안철수 대표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