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야권과 여권 일각의 퇴진 요구에 ‘버티기’ 내지는 ‘장기전’ 모드에 돌입했다는 관측이 제기되면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주 촛불집회 구호는 ‘대통령 퇴진’이었다. 여기에 야 3당이 가세하면서 퇴진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분명 부담스런 상황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헌정중단은 안된다”며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청와대 참모들은 그 이유로 ‘책임’이란 단어를 많이 쓴다. 대통령이 지금 당장 퇴진(하야)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일이 된다는 얘기다. 촛불로 나타난 민심은 ‘퇴진’인데 왜 그게 무책임한 일이 된다는건가.
여권의 한 고위 관계자 언급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17일 “박 대통령은 지금 대통령 개인의 몸이 아니다. 이제 박 대통령은 싫든 좋든 공동의 운명체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공동 운명체’란 다름아닌 범보수 진영을 의미한다.
당장 박 대통령이 그만두면 60일 안에 대선을 치러야 한다. 현재 보수 진영, 즉 여권 잠룡들은 대부분 ‘지리멸렬’이다. 지지율 10%를 넘는 주자가 없다. 반면 야권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필두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이재명 성남시장 등 후보군이 풍부하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즉각 퇴진하고 대선을 치르게 된다면 사실상 야당에 정권을 헌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대선을 치르자는 것은 전체 대한민국 유권자에 대한 도리도 아니고 전혀 공정하지도 않은 일”이라며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질 대통령을 뽑으려면 여야 후보 모두 충분히 준비된 상황에서 유권자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선 여권의 가장 유력한 차기 주자로 꼽히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내년 1월 귀국해 대권도전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또 국내 정치 지형의 변화가 불가피한 만큼, 여러 후보들이 새롭게 진용을 갖출 시간도 벌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청와대는 정치권의 탄핵 절차도 각오한 것으로 보인다. 탄핵이 현실화해도 국회 총리 선임과 탄핵 의결, 헌법재판소 절차 등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여 ‘즉각 퇴진’보다는 낫다는 얘기가 나온다. 여권 관계자는 “여러 상황을 감안해 박 대통령이 최대한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는데 보수 진영의 공감대가 형성돼 가는 과정”이라며 “당장 박 대통령이 싫다고 감정적으로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고 밝혔다.
법률가 출신인 정홍원 전 총리가 이날 “최순실이 저지른 불법, 위법 행위에 대통령이 개입한 사실이 있다면 그에 대한 응분의 책임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그러나 진실 규명도 되기 전에 대통령에게 무한 책임을 지라는 요구와 주장은 일시적 분풀이에 불과하다. 하루빨리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 전 총리는 이어 “모두들 대통령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비판이 난무하고, 진실을 추구하려는 목소리는 묻히고 있다”며 “진상이 드러나기도 전에 보도를 통해 모든 의혹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도 금기시하는 마녀사냥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나는 2년간 총리로 재직하면서 박 대통령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 기회에 대통령이 오랫동안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자주 있었다”며 “외부의 조력이 없이는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대통령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일부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조언그룹으로 서청원·원유철·최경환·홍문종 의원 등 이른바 ‘신 7인회’와 김기춘 전 비서실장,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등을 거론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퇴진 불가’ 결심을 굳힌 이면엔 여론 반전에 대한 기대도 남아 있는 듯 하다. 마음을 다잡고 흔들림 없이 국정을 챙기다 보면 언젠가는 국민도 진심을 알아주지 않겠느냐는 희망이 작용했다는 얘
[남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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