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오후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 장에서 박근혜대통령 탄핵소추안표결이 이뤄지고 있다. [이충우 기자] |
박 대통령과 최순실 일가의 인연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대통령은 영애 시절부터 18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고 최태민 씨와 최순실 부녀와의 관계를 지속해왔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박 대통령과 최순실 일가에 대한 각종 의혹과 루머들이 떠돌아다녔지만 많은 이들이 루머 정도로 여겼다.
박 대통령의 비선실세 논란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건, 2014년 11월 세계일보의 정윤회 십상시 문건보도가 나오면서부터다. 국회의원 시절 비서실장이던 정윤회 씨가 실세 중의 실세로 알려졌던 김기춘 비서실장을 내쫓으려 했다는 청와대 내부 문건이 공개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문서 유출을 ‘국기문란’으로 규정하면서, 의혹의 싹을 잘랐다. 대한민국 권력서열 1위가 최순실 이란 폭로가 나온 것도 이때다. 2년 전에도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을 밝혀낼 수 있는 계기가 있었지만,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 의혹은 수면 아래로 침잠했다.
올해 7월부터 각종 언론에서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에 청와대와 최순실, 전경련과 대기업이 지시·강요 관계로 얽혀있다는 점이 속속 드러났다.
최순실 씨의 국정개입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은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입수 보도였다. 박 대통령의 연설문 등 청와대 내부 문서가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을 통해 최씨에게 전달됐고,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친 것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이튿날 대국민 사과에 나섰으나, 역으로 촛불민심에 불을 댕기면서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대통령 2선 퇴진과 거국중립 내각 구성 선에서 야당은 정치적 타협을 보려했지만, 대통령의 거듭된 판단 잘못으로 청와대와 국회 모두 기회를 놓쳤다. 검찰 조사를 받겠다던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거부하면서 민의를 거슬렀다. 광화문 100만 촛불은 전국으로 번져나가며 지난 4일 6차 집회에선 230만명을 넘어섰다.
마지막까지 정치권과 줄타기를 하면서 반전의
[전범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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