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무력도발 위협이 계속되는 가운데 남북 협력 확대를 모색 중인 현 정권의 독자적 대북정책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177석 확보라는 4월 총선 압승에 따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충분한 여론 수렴도 없이 대북 유화정책을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북한의 남북관계 단절과 추가 도발 기조는 전혀 변화가 없는데 우리만 서둘러 제재를 완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통일부는 27일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를 열고 '유엔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UNESCAP)의 지속가능발전 역량지원사업에 남북협력기금 490만 달러(약 60억 원)를 지원하기로 의결했다.
UNESCAP는 빈곤 종식 및 환경 오염 등 보편적인 세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로, 이번 대북 사업은 간부들에 대한 회계 교육 등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통일부는 26일 우리 국민의 북한 주민 접촉 및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지방자치단체를 남북간 협력사업 주체로 명시하는 내용의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 초안을 발표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남측 주민이 북측 주민을 만날 경우 사전에 신고해 허가를 받아야 하고, 통일부장관은 남북교류협력이나 국가안보와 질서유지, 공공복리 등을 해칠 우려가 있을 경우엔 이같은 신고 수리를 거부할 수 있다.
반면 개정안에선 '신고 수리의 거부' 조항을 삭제해 사전신고만 하면 접촉할 수 있도록 했다.
올해로 제정 30년을 맞은 남북교류협력법이 개정되면 10년 전의 5.24 조치가 실질적으로 무력화할 소지가 크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3월 천안함 폭침사건 이후 개성공단과 금강산 제외한 방북 불허, 남북교역 중단, 대북 신규투자 금지, 대북지원사업의 원칙적 보류 등이 담긴 5.24 조치를 단행했다.
그런데 이번 법 개정으로 남북 주민의 단순 접촉은 신고하지 않아도 돼 사실상 대북접촉의 뒷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정부의 대공 첩보 수집 및 수사능력이 현저히 약화된 상태에서 우리 국민들이 북한 공작에 말려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종북 세력 및 북한 간첩이 그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활개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대북접촉 완화가 주요 내용인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경우 자칫 국가보안법 폐지의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과반 의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이 내부 갈등에 휘말려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한 것을 두고 자책과 한탄을 해왔다.
따라서 이같은 정황으로 미뤄볼 때 거대 여당이 새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까지는 반대 여론 때문에 어려울지 몰라도 최소한 법 개정은 밀어붙일 확률이 높다.
더 큰 문제는 지난해 2월말 베트남 하노이 미북정상회담 노딜 이후 문을 걸어잠근 북한이 아직도 핵무장과 적화통일 전략을 포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유화적인 대북정책에 순순히 호응해주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2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근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핵 전쟁 억제력을 더 한층 강화하고 전략무력을 고도의 격동상태에서 운영하기 위한 새로운 방침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전인영 서울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는 이에 대해 언론 기고에서 "북한의 핵개발이나 도발행위를 애써 외면하면서 남북협력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문재인 정부와의 관계강화는 북한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내 최고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분석가'로 꼽히는 정 박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도 "김정은은 (스스로의 입지가) 약하다고 느낄 때 더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며 "북한이 올해 더 많은 미사일 발사 같은 도발과 무력시위에 나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근 정부 내에서 북한의 비핵화 논의가 부쩍 줄고 남북 협력 드라이브만 부각되는 모습이 자칫 한미 공조를 허물고 양국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도 걱정스럽다.
유엔군사령부가 지난 3일 있었던 북한군의 우리군 CP(감시초소) 총격 사건에 대해 우리 정부 입장과 달리 "의도적인지, 실수인지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었다"고 밝힌 것도 이런 우려를 뒷받침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남북 교류협력 확대는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이지만, 지금처럼 한반도 정세가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과속은 금물이다.
정부는 '혁구습일도쾌단근주'(革舊習一刀快斷根株·뜻을 세우면 칼날로 뿌리를 자르듯 낡은 제도와 습관을 버려야 한다)라고 하지만, '욕속부달' (欲速不達·어떤 일을 급하게 하면 도리어 이루지 못한다)'이 될 수도 있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보상이나 칭찬 못지 않게 훈육과 처벌이 필요한 것
현 정권이 총선 승리에 취한 나머지 대북정책에서 균형감각을 잃게 되면 남북 관계는 물론 한미 동맹에도 불똥이 튈 수 밖에 없다. 정부의 보다 신중한 행보가 요구된다.
[박정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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