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주 에티오피아, 필리핀, 덴마크 대사와 제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지량(張志良) 예비역 중장이 2일 오전9시6분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91세. 본관은 흥덕(興德), 호는 석은(石隱).
1924년 전남 나주에서 출생한 장 전 총장은 광주서중을 나와 육군항공사관학교 60기(일본 육사 60기)를 수료한 뒤 해방 후인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5기로 졸업했습니다. 같은 해 국방경비대에 근무하며 공군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항공기지사령부에 몸을 담았으며 이듬해 10월 공군 창설 멤버가 됐습니다.
장 전 총장은 6.25 전쟁에서 직접 전투기를 조종하거나, 지휘관으로서 낙동강 방어전, 북한 평양 미림비행장 점령 작전 등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경남 사천에 있는 전투비행단 작전참모로 재직하던 1951년 7월 김영환 당시 비행전대장을 보좌해 진행한 지리산 무장공비 토벌 작전에서 경남 합천 해인사 폭격을 중단시켜 팔만대장경을 지켜냈습니다. 장 전 총장은 “김영환 전대장에게 무장공비가 숨어있는 해인사를 직접 폭격하지 말고 무장공비가 이동할 때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고 자서전을 통해 밝힌 바 있습니다.
1951년에는 제10전투비행단 소속 F-51기가 적의 대공포에 노출돼 인명손실이 발생하자 비상탈출한 생존 조종사들을 빨리 구출하기 위해 빨간 마후라를 착용할 것을 제안해 ‘빨간 마후라’의 유래가 됐습니다.
1952년부터는 최전방인 강릉 전투비행단을 지휘했으며 1953년 2월 동해안 351고지 터널파괴 작전에서 근접 항공지원 폭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미국 동성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이어 1953년 7월 휴전 직전까지 최대 회수의 출격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전쟁 후 1954년부터 주미 대사관 공군 무관으로 재직하며 한미 군사협력을 통한 공군전력 강화에 힘썼으며 1959년 공군 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5.16 직후에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군인 신분을 유지한 채 대한중석 사장으로 부임해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켰습니다.
1966년 공군 중장으로 진급해 2년간 공군참모총장을 지냈습니다.
예편 후 1969년 에티오피아 주재 대사에 임명됐습니다. 주 에티오피아 대사 재직시 셀라시에 황제와 돈독한 관계를 맺어 1972년 에티오피아가 한국의 유엔 가입에 찬성표를 던지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임기를 마친 뒤 1973년에 필리핀 주재 대사로 자리를 옮겨 76년까지 대사직을 수행했고 덴마크로 임지를 옮겨 78년에 귀국했습니다.
덴마크 대사를 마칠 무렵 유정회 의원으로 지명돼 제10대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에 임했습니다. 1979년에는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서 회의론이 팽배했던 서울 올림픽 유치 신청을 주도했습니다. 1995년부터 사단법인 한국군사학회 회장을 맡았고 97년부터 2년간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5대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장 전 총장 유족으로는 장대환 매경미디어그룹 회장 등 3남2녀가 있습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발인 2월4일 오전7시30분.
영결식은 4일 오전7시 서울아산병원 1층 영결식장에서 공군장으로 엄수되며, 서울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에 봉안됩니다.
※연락처 : (02) 3010-2631 (빈소).
◇주요 어록
“우리가 일본에 합방 당한 것은 군대가 약해서이다. 군대가 약했던 것은 조선 왕실이 군대를 잘 돌보지 않은 탓이다.”
“앞으로 전쟁은 항공이 절대적이다.”
“군인은 공로를 탐해서는 안되고, 공을 남에게 돌리는 배려정신을 가져야 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보존과 관련해서도 “군인의 당연한 임무라 자랑은 아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서 어린 아이가 된다면 커서 다시 비행사가 될 것이다. 죽을 때 까지 하고 싶은 일이다.”
“조종사로서 중요한 것은 본인이 위험을 느꼈을 때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조종사로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먼저 알아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할 일을 제대로 못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