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수·합병(M&A) 전에 불법 행위로 행정처분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보증했다가 이후 적발돼 처벌 받았다면 매도자는 매수자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문제가 된 불법 행위에 매수자와 매도자가 공동으로 연루돼 매수자가 사전에 불법 행위를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도 계약상의 책임은 매도자에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 2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15일 현대오일뱅크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63)과 한화케미칼, 한화개발, 동일석유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현대오일뱅크는 1999년 김 회장 등으로부터 한화에너지 주식 400만주를 사들였다. 인수·합병 이후 한화에너지는 인천정유로 상호를 바꿨다.
합병을 진행하면서 현대오일뱅크는 계약서에 “한화에너지 및 프라자는 일체의 행정법규를 위반한 사실이 없고, 이와 관련해 행정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거나 협의를 진행하는 것은 없다”는 진술·보증 조항을 포함시켰다. “주식을 넘긴 이후 진술·보증 조항을 포함한 위반 사항이 발견된 경우나 계약상의 약속사항을 위반해 인천정유 또는 현대오일뱅크에게 손해가 발생하면 김 회장 등 한화 측은 500억원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손해를 배상한다”고도 약정했다.
그런데 1998년부터 해오던 군납유류 담합 행위가 지난 2000년 공정거래위원회에 발각됐다. 인천정유가 현대오일뱅크와 GS칼텍스, 에쓰오일 등과 함께 입찰 담합을 저지른 것. 공정위는 이들에게 시정명령과 함께 475억원 상당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정부는 2001년 군납유류를 담합한 정유사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돌입했고, 현대오일뱅크는 소송 비용으로 거액을 지출하게 됐다. 현대오일뱅크는 계약서의 진술·보증 조항을 근거로 김 회장과 한화를 상대로 322억원을 내놓으라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한화 측의 책임이 인정돼 8억27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현대오일뱅크도 담합에 가담한 행위자로서 사전에 사건을 예견할 수 있었던 ‘악의’의 매수인이라며 1심을 깨고 한화에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항소심 판단을 한 번 더 뒤집었다. 재판부는 “현대오일뱅크가 위반 사항을 계약체결 당시 알았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김 회장 등 한화 측이 현대오일뱅크에게 위반 사항과 상관 있는 손해를 배상하기로 하는 합의를 한 것”이라며 “담합 행위로 공정위 제재 가능성을 양도할 주식 가치 산정에 반영할 기회가 있었더라도
대법원 관계자는 “계약 당사자 사이에 계약 내용을 서면으로 작성한 경우에 문언의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문언대로의 내용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김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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