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 첫 경비반장으로 활약했던 최헌식 옹(아랫줄 왼쪽 세 번째)이 지난해 말 울릉경찰서에서 김해출 서장(두 번째) 등 경찰 후배들과 만나 힘차게 독도수호를 외치고 있다. <제공=울릉경찰서> |
“당장 나가라고 고함을 지르고 쫓아냈지. 우리가 강하게 나오니까 일본도 꼼짝을 못 하더라고.”
매년 3·1절이 다가오면 그의 뇌리에서는 1953년 7월 독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대한민국 ‘제1호’ 독도 경비반장으로 당시 일본 해상보안청과 맞서 싸웠던 최헌식(93·울릉읍) 옹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1945년 경찰 창설 당시 경찰 1기로 현재 국내 최고령 퇴직경찰관이기도 한 최 옹은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독도 침탈을 시도했던 일본 정부의 행태를 꾸짖었다.
“당시 일본 순시선들이 우리 어선들의 조업을 방해하며 괴롭힌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민들 신고를 받고 출동을 해서 가보면 어느샌가 사라져 버리고 없더라고. 그런데 7월에 해상보안청 직원들이 일본 기자 10여명을 데리고 독도에 들어온거야. 우리가 6·25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 독도를 뺏으려 한 거지.”
일본인들이 독도에 입도했다는 어민들의 신고에 열이 난 최 옹은 통역을 위해 당시 울릉중고등학교 교사 2명과 함께 독도로 이동했다. “한국 땅에 왜 자꾸 기웃거리느냐. 얼른 나가라”며 해상보안청 직원들과 일본 기자를 상대로 20여분에 걸쳐 담판협상을 하는 동안 울릉경찰서 수사과장까지 합류해 이들을 돌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다시는 독도에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로 소총과 기관총으로 위협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최 옹은 당시 담판협상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무지한 독도 역사에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고 귀띔했다. “독도가 왜 너희들 땅인지 설명을 해보라고 하니 아무 말도 못 했어. 통역을 통해 우리가 조목조목 한국 고유의 영토임을 역사적으로 설명을 하니까 심지어 일본 기자들조차 ‘아 그렇습니까?’라며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당시 최헌식 경비반장을 더욱 화나게 만든 건 일본 순시선들이 잊을 만하면 입도해 ‘시마네현 다케시마(島根縣 竹島)’라는 글을 적은 표시목을 몰래 심어놓고 가는 것이었다.
매번 표시목들을 빠짐 없이 수거해 경찰국에 올려보내면서 전시 중에 경황이 없었던 정부로서도 독도 수호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 같다고 당시 최 옹을 비롯한 독도 경비대 직원들은 굳게 믿고 있다.
이런 얘기를 담담하게 털어놓는 사이 부인 이경남 씨(85)는 “어휴, 남편 독도 경비반장 할 때만 생각하면…독도 근무를 마치고 울릉도에 들어와야 하는데 날이라도 궂으면 항구 앞에서 기도를 하며 하염 없이 울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실제 작은 목선에 몸을 싣고 독도와 울릉도 사이 80여㎞를 이동하는 동안 최 옹은 거센 파도와 사투를 벌여야 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단다. 부인 이 씨는 “남편은 최초 독도 경비반장이라고 언론에서 관심을 갖지만 그 때 나는 귀양살이보다 더 힘든 생활을 했다”며 “파도 때문에 독도에서 울릉도로 제때 돌아오지 못하고 근무자들 식량도 떨어져서 남편이 굶고 지내다 돌아올 때면 속도 많이 상하고…”라고 거듭 한숨을 쉬었다.
3·1절을 맞아 최 옹은 독도를 수호하는 후배 경찰들에게 일본이 여전히 독도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평생을 울릉도에서 나고 자란 그이기에 더더욱 독도가 내집 앞마당 같다는 그는 “얼마전 한일 정상들이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서 잘못을 인정했다고 하는데 아직은 더 지켜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53년 경비를 할 때도 안 오겠다고 물러났다가 끊임 없이 독도 영해를 침범한 게 바로 일본”이라며 “우리 위안부에 대한 사죄도 겸손한 태도로 진짜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 때까지는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자신과 동년배이기도 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한·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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