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의사 의거 터를 알리는 비석에는 자전거가 걸쳐 있고 음식물 쓰레기 등 오물로 더럽혀져 있다. 비문은 새똥으로 뒤덮여 글씨를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김호영 기자] |
◆쓰레기 더미에 노숙인 분뇨, 방치된 현충시설의 ‘눈물’
광복절을 닷새 앞둔 지난 10일 매일경제는 서울과 경기도 일대 현충시설을 찾았다. 이재명 의사 의거 터를 알리는 비석 주변에는 전날 치우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와 담배꽁초들이 눈에 띄었다. 그 옆으로 쓰레기통이 설치돼 있던 탓이다. 인근 상가 건물 관리자는 “‘명동 정화 운동’을 하면서 한 달 전에 의거 비 바로 옆에 쓰레기통을 설치했다”며 “쓰레기통이 있다 보니 주변 상가에서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으로 알고 일몰 이후에 봉투를 내 놓는다”고 말했다.
독립 운동가들의 동상 역시 처참한 상황이었다. 노숙인들이 다수 체류하는 서울역 인근 강우규 의사의 동상 주변에는 담배꽁초와 깨진 소주병이 흩어져 있었고 분뇨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곳을 지나가던 강 모씨(53)는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른다. 항상 코를 막고 지나가기 바빠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19년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졌던 강 의사 의거에 대한 설명은 동상 뒤편으로 돌아 가야 찾을 수 있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동상을 무심코 지나갔다.
지방에 위치한 항일 사적지도 관리가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동두천 소요산 입구에 위치한 ‘홍덕문 지사 추모비’는 등산객들을 맞으려는 노점상들의 파라솔 뒤편으로 묻혀 버렸다. 홍 지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동두천 장터에서 시위를 이끈 항일 애국지사다. 지난 1975년 뜻있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행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관리 부실 지적이 나왔던 연천군 항일의병위령비 역시 안내표지판도 없이 사건 현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 된 처지였다.
◆친일인사 기념물엔 ‘독립운동’ 업적 소개
그러나 친일 행적을 일삼은 인사들의 기념물에는 버젓이 독립운동 행적이 기록돼 황당한 풍경을 연출했다. 지난 10일 친일행위자 기념물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서울 소재 10곳을 전수 조사한 결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추모비 등에는 그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문구로 가득채워졌 있었다.
친일행적이 있는 한 작가의 서울 종로구 소재 기념비에는 ‘일제강점기 작가 가운데 가장 투철한 사회의식을 가진 작가’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고, 서울 중구 국립극장내 위치한 기념물에도 ‘근대 무용의 선각자로 불멸의 춤 작품을 남기신 분을 기린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들의 기념비에는 친일 행적을 시사하는 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서울 중랑구 망우리애국지사 묘역에 위치한 연보비에는 한 친일행위자의 ‘독립운동’ 행적만이 기록돼 변절한 뒤 반민족 행위를 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곳에 초등학생 딸과 유치원생 아들을 데리고 나온 시민 A씨는 “비석에 나온 내용만 보고 아이들에게 ‘독립운동가’라고만 설명했다”며 “친일 행위가 있는 사람의 비석을 세워 두다니 이곳을 찾는 아이들이 뭘 배우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한영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비석의 주인공은 선(先) 항일 후(後) 친일이라도 전향 이후 친일의 정도가 심했다”며 “비석이 세워져 있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독립운동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정부소유 건물 및 공공시설 등에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기념하는 추모비 등은 시·군 22곳에 34개가 설치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예산은 반토막, 의도된 방치인가
현충시설은 급증하고 있지만, 예산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지난 2003년 811개였던 현충시설은 올해 4월 기준 2924개로 3배 이상 늘었다. 국내에는 총 1981개(2015년 기준)가 지정 운영 중이다.
그러나 관련 예산은 지난 2013년 452억 원에서 2014년 178억 원으로 반토막 난 데 이어 지난해에는 80억원으로 또 반토막이 났다. 다행히 올해 전체 예산은 260억 원으로 올랐지만 관리 예산은 43억 원 규모로 지난해와 비슷했다.
현충시설 관리 주체가 나뉜 탓에 체계적이고 책임 있는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특히 현충시설의 정책총괄업무가 국가보훈처 1개 과에서 담당하고 있어 업무의 성과와 효율성을 담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현충시설 관리주체로는 지자체가 1009개로 가장 많은 현충시설을 관리하고 있으며, 문중대표 176개, 기념 사업회 150개, 학교 118개 등의 순이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지금은 지자체가 임의대로 현충시설을 관리하고 지정하는 구조라 중앙정부에서 모르는 부분이 나올 수도 있다”며 “법령 개정을 통해서 중장기적인 발전 계획을 만들어서 현충시설 건립과 관리에 유기적인 구조를 만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유준호 기자 / 송민근 기자 / 이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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