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서교동 화재현장에서 이웃들의 목숨을 구한 ‘초인종 의인’ 안치범씨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화제가 된 데 이어 24일 쌍문동 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한 주민이 대피하면서 문을 두드려 이웃을 깨운 사실이 확인됐다. 경주 지진 발생이후 정부의 부실한 대응 속에서 스스로 자기 살길을 각자 챙기자는 ‘각자도생’ 움직임이 커지는 씁쓸한 풍경 속에서 여전히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한 인정과 희생정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이 또 한번 증명된 것이다.
24일 새벽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에서 전기합선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일어나 일가족 3명을 포함해 총 2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오전 4시30분께 쌍문동 15층짜리 아파트 13층에서 발생한 화재는 약 1시간10분만에 진화됐다. 불이 난 집에 사는 일가족 5명 중 부친 이씨와 10대 딸 2명 등 3명이 숨졌다. 경찰 관계자는 “불이 번진 모양새 등으로 보아 불은 이 집 거실에서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거실의 텔레비전 장식장 뒤편의 배선에서 단락흔(끊어진 흔적)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이어 “전기적 요인으로 화재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방화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희박하다”고 설명했다.
화재가 발생했던 시간이 주민들이 깊이 잠들어 있던 주말 새벽시간이었고 화재당시 대피방송 등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큰 참사로 번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지난 9일 5층 규모 빌라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초인종’을 눌러 이웃들을 대피시키고 숨진 ‘서교동 화재 의인’ 고(故) 안치범 씨처럼 이웃을 대피시킨 의인이 이를 막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화재가 발생한 집 바로 아랫집에 사는 김경태씨가 그 주인 공이다. 경찰과 아파트 주민들에 따르면 이날 화재가 발생한 쌍문동 아파트 13층 집의 바로 아랫집에 거주하는 김씨는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 윗집에서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 불에 타는 냄새를 맡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김씨는 윗집 큰아들 이모(21·입원)씨가 12층에서 소방 호스를 끌어다가 현관문 안쪽으로 물을 쏴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고 이씨에게 “빨리 피신하자. 목숨이 위험하다. 나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씨는 부친과 어린 두 여동생이 아직 갇혀 있는 집 안쪽으로 계속 물을 쏘기만 했다고 한다.
김씨는 우선 가족들에게 불이 났음을 알린 다음 침착하게 수건에 물을 적셔 건네주고 아내와 자녀를 1층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줄곧 1층까지 뛰어 내려가면서 다른 집 현관문들을 모두 두들기며 “불이야, 불!”이라고 외치며 이웃들을 깨운 것으로 파악됐다. 김씨는 “심야 시간이라 자고 있을 이웃들에게 알려야겠다 싶어 문들을 두들기며 소리 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해당 동의 주민 대다수는 화재 당시 위층이 소란스럽다고 여기긴 했으나 무슨 일인지 몰랐다가, 김씨 덕분에 화재 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8층에 거주하는 전모씨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김씨 외에도 여러 명의 사람들이 피신하지 않은 집들의 대문을 두드렸다”고 말했다. 김씨가 깨운 사람들이 이웃주민을 또다시 깨우고 그 주민들이 다시 피신하면서 다른 집에 위험을 알렸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아파트 관리사무소 측은 “김씨가 이웃들에게 누군가는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말했고 병원에 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의인이라는 보도가 나간 후 김씨가 ‘의인’이라는 명칭에 대해 매우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고 전했다.
[황순민 기자 / 양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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