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일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건 책임을 물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4차 촛불집회가 서울 광화문 광장과 일대 도로에서 열렸다. 오후 9시가 되자 일제히 촛불을 들고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19일 저녁 이슬비가 촉촉히 적신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 행사장. 가수 전인권의 애잔한 목소리로 ‘걱정말아요 그대’ 노래가 울려 퍼지자 꼭 끌어안은 모녀는 서로 눈물을 닦아줬다. 아들·딸들에게 기성세대로서 부끄러운 어른들은 ‘사과’의 손길을 내밀었고 자식 들은 “엄마·아빠 탓이 아니다”며 노랫말처럼 서로 ‘상처’를 어루만졌다.
4차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린 이날 서울 도심에는 60만명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을 촉구했다. 부산과 대구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95만개의 촛불이 켜졌다. 매일경제는 서울 시청 앞· 광화문 광장 등에서 10대에서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참여자들을 만났다.
다양한 연령의 참여자들을 만나면서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툭하면 참여자와 비참여자간, 기성세대와 신세대간 벌어진 갈등은 목격하기 힘들었다. 세대별·지역별로 저마다 거리로 나온 이유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삼류정치로 인해 길가에 버려진 국민”이라는 공감대가 커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촛불은 화해와 위로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서울 광화문 광장을 홀로 찾은 노신사 김종길 씨(75)는 집회에 나온 젊은 학생들 고사리 손을 붙잡고 연신 “미안하다”며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참 기특하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그는 스스로를 ‘꼰대 세대’ 부르며 젊은 세대에 대한 ‘사과’를 위해 광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그의 동네 친구들은 서울역에서 진행 중인 보수단체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서울 4호선 종각역 인근에서 만난 한재원(58) 연세대 교수도 기성세대로서 책임을 통감했다. 그는 이 땅의 민주화를 이뤄낸 386세대다. 한 교수는 “지금 광장으로 이 젊은 청춘들을 내몰고 있는 것은 한순간 386이 민주주의를 일궈냈다는 승리감에 도취된 채 어느 새 ‘기득권’으로 안주하면서 제대로 된 정치지도자를 뽑지 못했다”며 “하지만 국민 모두가 뭉치면 이번 기회가 한국 사회를 도약시킬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모차 부대와 넥타이부대가 거리로 나온 이유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이들에게 이런 나라를 물려줄 수 없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사회복지사로 일하고있다는 신현식 씨(37)는 두 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광장으로 나왔다. 그는 “한푼 두푼 모아 집한 채 장만하기 어려운 게 한국 현실”이라며 “권력과 가깝단 이유만으로 새파란 얼굴의 친구들이 고위직을 누리는 것을 보면 한국의 ‘신분상승 사다리’는 이미 무너졌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10~20대 젊은 층들은 최순실과 권력의 부패보다 최씨 딸 정유라의 학사농단에 더욱 분노를 느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직접 제작한 대형 LED 촛불을 들고 나온 공대생 정지우 씨(22·성균관대 전자전기 3학년)는 “무한 경쟁 속에서 간신히 취업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든데 돈이 실력이라는 정유라의 SNS에서 참담함을 느꼈다”라고 했다. 그러나 정씨는 “이 곳에서 많은 어른들이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다시 태어나도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우리 아빠·엄마 아들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수능을 마친 고3생들도 다수 집회에 참가했다. 일부 고3생들은 이날 집회행사를 돕는 자원봉사단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집회장 곳곳에선 이런 교복부대 학생들이 지날 때마다 길을 터주는 ‘모세의 기적’이 목격됐다. 행사 무대에서 어른들이 “깨끗한 한국을 만들지 못해 우리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말하자 “괜찮아요. 사랑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라며 힘찬 위로와 응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이제 동·서 지역차도 넘어선 지 오래다.
대구, 광주, 대전, 부산 등 지방 주요 도시는 물론 상당수 중소도시까지 약 100 여곳 시민들도 촛불 대오에 동참했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텃밭인 대구에서는 71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대구비상시국회의가 1만5000여명(경찰 추산 5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촛불을 들었
광주 촛불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3만명 이상, 경찰 추산 1만7000여명이 참가했다. 부산에서도 2만여명(경찰 추산 7000여명)이, 대전에서는 3만여명(경찰 추산 6000여명)이 참가했다. 주최 측은 이날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 35만명이, 경찰은 오후 7시 기준으로 7만여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했다.
[기동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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