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현장의 목소리 전달을 위해 이용수 할머니의 육성발언을 구어체 그대로 적었습니다**
-처음기자회견 할 때 이거 읽습니다. 이것을 제가 읽기는 좀 힘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전부 카메라로 찍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부밖에 없는데 그래서 이것을 이따가 보여드리면 되고, 제가 두 번째 기자회견을 합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또 잘못했다고 하는 건 제가 처음에 기자회견할 때 했는데, 많이 생각도 못한 것이 나왔습디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검찰에서 할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정신대 대책 협의회입니다. 정신대 대책 협의회는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입니다. 그런데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 정신대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아주 더럽고 듣기 싫은 위안부 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공장에 갔다온 할머니는 공장에서 일하고 했지만 위안부 할머니는 간 곳이 다 다릅니다.
잠깐 제가 간 곳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나이로 하면 16살. 만으로 하면 14살. 저는 양력으로 돼 있습니다. 그 때의 성을 갈지 않으면 배급을 안 줬습니다. 성을 갈아서 야스하라라고 갈았습니다.(?) 그런데 학교도 그 때는 일본 학교입니다. 제가 3,4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가타가나를 알았습니다. 끌려가서도 대만, 신의주, 가미가제부대, 특공대 부대로 끌려가서도 그 장교가 가타가나로 이래 써줘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 군인이 하는 이야기도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적어주는 걸 해보라했습니다. 이 군인이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지어주면서 “나도 도시코같은 피해자라는 걸 적어줬어”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 후에 제가 생각할 때 끌려가서 당한 건 말로도 못해. 제가 쭉 30년동안 해 오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이 증언을 했어. 그러면 제가 확실하고 또 바른말 하고 이러니까 정신대 대책 협의회라는 곳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92년도 2월 25일 신고를 할 때, 윤미향이라는 간사였습니다. 간사한테 했습니다. 25일 날 했는데 29일 날 모임이 있다고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어느 교회입디다. 갔었는데, 그 날 따라 일본 어느 선생님이 정년퇴직을 하고 돈을 천엔인가? 얼마인가를 줬다 그러면서 백만 원 씩 나눠 줬습니다. 그게 무슨 돈인줄도 몰랐습니다. 그 때부터 모금을 하는 걸 저는 봤습니다. * 왜 모금을 하는 지 그것도 몰랐습니다. 따라 다니면서 모금하는데 보니까, *농구선수들이 농구를 하는데 기다렸어요. 기다렸는데 그 농구선수가 돈을 이렇게 들고 모금을 하더라고요. 그 돈을 받아 오더라고. 그래도 저는 그게 왜 그런 줄 몰랐습니다.*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저렇게 농구를 하면서 애를 쓰고 이길려고 하는데 거기 버젓이 앉아서 농구 끝나고 하면 돈을 받아서 나왔습니다. 좀 늦었습니다. 좀 늦게인데, 배가 고픈데 좀 맛있는 거 사주고 하니까 돈 없습니다. 돈을 거둬 가지고, 그래도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디가도, 교회가도, 돈을 주면 그걸 얻었나보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모르고 쭉 30년을 여기 나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정신대 대책 협의회입니다. 그러면 공장 다녀 온 할머니들로 해야 되는데, 빵으로 예를 들면 공장 갔다온 할머니들은 밀가루로 만들어서 빚어놓고, 속은 맛있고 귀하고 그런 걸 넣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속은 위안부입니다. 그런 그걸 해도 쭉 30년을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그그저게까지 몰랐습니다.
어제 저녁에 가만히 생각하니 이것은 왜 뭐 때문에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이 위안부 생명을 걸고 끌려간 위안부를, 왜 자기가 정신대 할머니와 합쳐가지고 쭉 이용해왔습니다.
저는 그것도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저께 제가 생각하니, 이럴 수가 있나 30년 동안 앉아가지고 이야기하는게 ‘사죄해라, 배상해라’ 하는데 일본 사람이 뭔 줄 알아야 사죄하고 배상을 하죠. 섞어 가지고 이거는 사죄도 하지말고, 안해도 된다는 거 아닙니까? 이거를 30년 동안 해 나오면서도 사죄 배상을 요구하고, 그 학생들까지 고생을 시켰습니다. 그 학생들 돼지저금통 털어서 나온 그 돈도 받아서 챙겼습니다. 어제 저녁에 잠도 한 숨 못잤습니다. 왜 뭐 때문에 정신대 대책 협의회만 정신대 문제만 하지 자기들이 무슨 권리로 위안부 피해자를 만두의 고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저는 자다 일어서 펑펑 울었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이렇게 당하면서 이 때 까지 말도 못했나 생각하니, 내일 기자회견에서는 이것을 반드시 밝혀야겠다. 저희가 사죄, 배상 요구하는 걸 막았잖아요. 위안부하고 정신대하고 어떻게 같습니까? 위안부는 생명을 걸어 놓고 거기서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을 30년을 이용해왔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내일 기자회견 할 때는 이것을 반드시 밝혀야 겠다. 일본이 바보입니까? 정신대 대책 협의회가 위안부 문제를 하는데, 거기에 해당하지도 않는데 뭐하러 그 사람들이 사죄하고 배상하겠습니까? 안 한 이유를 저는 알았습니다. 이것 또한 무엇입니까? 사진 한 장만 해도 걸어두고 했는데 이것은 할머니들로 위안부 할머니들로 팔아먹었습니다. 팔았습니다. 내가 왜 팔려야 됩니까?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부모님들은 불면 날아갈까 쌀 한 움큼을 넣어가지고 엄마가 치마에 감쳐가지고 “이리 와” 해가지고 먹이고 했습니다. 이런 남의 집 귀한 딸을 밤에 그것도 끌고 가서 대만 신의주 가미가제 부대를 가서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끌고 가서 전기 고문과 갖은 칼로 몸을 그려서 이렇게 죽여놨습니다. 그런데 군인이 보니까 방에 들어가라고 보니까 군인이 하나 앉아있는데 안 들어간다고 이래 우는데 머리를 질질 끌고 가서 자물쇠 큰게 달려있습니다. 그걸 빼서 문을 확 열더니만 확 밀었습니다. 또 일으켜가지고 발로 그것은 돌덩이보다 더 위험한 군화발이었습니다. 허리를 발길로 차가지고 엎어졌는데, 너무너무 배가 찢어지도록 아프고 죽도록 아퍼가지고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래도 빌면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이래도 앉혀가지고 두 팔을 감고 지금 머리에 귀에 소리 납니다. 그때 제가 엄마라고 크게 불렀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귀에서 나는지 머리에서 나는지 어린나이에서부터 지금도 납니다. 이래도 이걸 왜 그런지 누구한테라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대 대책 협의회라면 이걸 밝혀줘야 하지 않습니까? 할머니 어디 다녀왔습니까라고 밝혀야 하는데 한 번도 증언한 번 받은 적 없습니다. 93년도부터 서부동에 집 있었습니다. 책을 놓고 6천 500원에 파는 걸 봤습니다. 그래도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 걸 챙기는 줄 모르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하고 다니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제가 제 일이라고 생각하고 증언도 하고 또 정신대 대책 협의회 박물관을 짓는데, 그 때 박경임 씨 하고 저희 큰 조카 내외하고 저하고 가서 15만 원 받고 정신대 대책 협의회에서 증언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그 박물관이라든지 대표가 있습니다. 대표란 소리 하지 말아라, 창피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대표 소리는 안해도 대표 대우는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3월 30일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미향 씨 이러면 안 되잖아. 안 그러면 기자회견 할란다”고 말했는데, 아주 큰 소리로 당당하게 “기자회견 하세요”라고." 하세요." 하길래 제가 5월 7일 날 기자회견 한 겁니다. 이런 등등을 제가 하나하나 말씀 못드리겠습니다. 빨리 생각이 안납니다.
이래서 제가 기자회견 했는데 어느 날입니다. 소위 그 국회의원으로 나올 적에 도와준 건 없지만, 걔보고 되야 된다는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따구로 행동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나갔다가 들어오니까 문을 열어달라고 해서 문을 열어주니까 윤미향 씨가 싹 들어오는 겁니다. 제가 놀라서 깜짝 넘어갈 뻔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릎을 꿇고 무슨 말인지 용서? 뭐를 용서합니까? 무엇이든 가지고 와야 용서를 하죠. 뭐를 용서? 보니까 엄청나더구나, 그것은 검찰에서 다 할 것이고, 내가 며칠 후에 기자회견을 할 테니 그 때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갔는데, 나가 보니까 소위 교수라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 내가 말은 안했습니다. 차에 내려서 휠체어 타려고 하니까 뻔뻔스럽기 짝이 없어요. 이런 사람이 윤미향이를 뽑으라고 했답니다.
무엇입니까 이거는? 윤미향에게 며칠 후에 기자회견 할 테니까 오라고 하고 나갔는데, 거기서 무슨 원수 진 것도 아니고 30년을 지내왔습니다. 했는데 한 번 안아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저는 생각에,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안아주니 저도 인간입니다. 사랑은 내리 사랑입니다. 30년을 같이 있으니 원수도 아니고 하는데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눈물이 왈칵 나서, 제가 안고 울었는데 이걸 가지도 기자님들 좀 부탁드립니다. 명백하게 기사를 내 주세요. 그걸 가지고 ‘용서했다’ 이런 기사 너무 황당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제가 이거를 명백하게 하려고 그랬는데 혼자 생각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걸 그만 둬라, 하지 말아라 할 수 없었습니다. 해서 있었는데 이 사람을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한 마디 말도 없이 맘대로 팽개쳤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국민들, 세계 여러분들이 나옵니다. 그 분들도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래놓고, 또 자기가 사리사욕 채워가지고 마음대로 국회의원 대표도 나갔습니다.
저한테는 이야기 없었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니까, 제가 무슨 용서를 합니까 이름도 성도 없는 용서? 자기 마음대로 했으니까 하던지 말던지 하는 건데, 저한테 책임을 물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뭐 때문에 용서를 바랍니까? 그거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를 제가 다 말씀을 못 드립니다.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지가 받아먹었습니다. 30년 동안 죄를 졌습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뭔 용서를 바랍니까. 해서 저는 데모 방식을 바꾼다는 것이지, 끝내는 건 아닙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고, 또 다시 새롭게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걸 하기 위해서 제가 이걸 바꾼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도 이야기 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입니다. 학생들이 결국은 그 나라 주인 아닙니까? 그러니까 학생들이 알아야 그럼 사죄 배상을 한다고 하는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일본 아베는 한국이 거짓말 한다. 학생들에게 물으면 한국이 거짓말한다고 할텐데 일본 학생들도 그걸 모르고, 한국이 거짓말만 하는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겁니다.
일본과 한국을 학생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이게 세월이 오래 갈 겁니다. 그래도 학생들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 한국이 왜 일본한테 배상하고 사죄하라고 하는지, 이런 걸 이야기하면 일본은 왜 하지 않냐 하면 그게 아니라고 하고 거짓말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한국이 거짓말만 한다고 들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거를 학생들한테 가르쳐서 서로 왕래하며 친해지면 속에 할 말도 있고 배워야 합니다. 배워야 알지요. 그래서 제가 짧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대구에 역사관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정신대 할머니와 함게하는 시민 모임이었어. 누가 했어? 대구에 아주 유명한 최봉태 변호사가 대표로 있으면서 이걸 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에 윤미향이를 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할머니, 윤미향 욕하지 마세요. 김복동 할머니 천대받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에 돈은 많이 내고 있으니까” 그러면 납입기금이라 하는거 김복동 할머니 이름으로 했다고 해서 김복동 할머니 돈입니까? 어느 날 윤미향이 모금을 600만 원 했는데, 저에게 전화가 왔어. “할머니 정대협 사람 아닙니다”라고 모욕을 해요. 이것 또한 말이 됩니까? 그러면서 모금을 한다고 했습니까, 제가 간다고 했습니까? 이 뿐 아닙니다. 많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30년 그것만 이야기 했는데, 줄줄줄 나오는 게 엄청나게 나옵디다.
왜 위안부 할머니를 자기가 했습니까? 그러니, 이것도 부정 아닙니까? 이것도 죄를 받아야 됩니다. 한 때 그래도 끝까지 사죄, 무슨 사죄 입니까. 저는 김복동 할머니요? 그 김복동 할머니는 한 쪽 눈이 실명입니다. 저보다 두 살 위입니다. 실명이고 한쪽 눈 조금 보이는 할머니를, 끌고 다녔지요. 미국으로 어디로 끌고 다니면서도 있을 때 잘하고 할머니 있을 때 잘해줘야 하는데, 고생 시키고 끌고 다니면서 할머니 이용했으면서도 뻔뻔하게 묘지에 가서 눈물 흘려요? 그건 가짜의 눈물입니다. 병주고 약주고 하는 이런,,, 그것도 죄인데 그것은 다 검찰에서 밝힐 일들입니다. 하지만 정대협에서 위안부를 이용한 것 가지고 한 건 도저히 용서 못합니다. 이것도 또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끝까지 제가 나이가 들고 보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 올바르게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과 학생들도 이렇게 해서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올바른 역사를 공부해서, 위안부 문제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적혀놨습니다.
이것은 천년 만년이 지나도 일본이 해야 합니다. 이런 걸 가르치기 위해선 양국 간 친하게 지내면서 역사 공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 사람들이 꼭 역사의 주인이니까 이 분 들을 올바른 역사 교육 시켜서 이 억울하고 누명 쓴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 해결 해줄 사람은 학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증언을 다 해야 하고, 늦게 까지 살아있는게 죄 입니까? 끝까지 이렇게 당하고 있는 제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할머니들한테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다, 언니 동생들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으니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랍니다. 그래서 그걸 생각하니까 저는 하나도 부끄럼이 없습니다. 이렇게 위안부입니다 위안부. 위안부가 여자입니다. 이것이 저는 세계의 여성분들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세계의 여성 여러분들, 저희가 위안부긴 하지만 여성이라는 두 글자가 너무 미안하고 해서 어떻게 하면 이런 것도 좀 미안한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을 했는데 이 기회를 해가지고 모든 여성분들게 정말 미안합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누명도 쓰실 것이고, 여자이기 때문에 ‘위안부는 여자다’라는 것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런 소리도 들으실 겁니다. 해서 제가 한 사람 한사람한테 어떻게 합니까. 이런 기자회견을 통해서 세계 여성분들한테 이 확실한 위안부가 여러분들의 여자라는 두 글자에 손상을 입혔다는게 참 죄송합니다. 제가 마지막 말씀 드릴 건, 제가 교육을 확실히 두 나라가 서로 왕래하고 친하게 지내서, 이 역사를 아셔가지고 이 억울하고 억울한 위안부 문제를 사죄받고 배상해야 제가 사죄를 받아야 위안부 누명을 벗습니다. 제가 왜 위안부고 성 노예입니까? 그 더러운 성 노예 소리를 왜 하냐니까 미국에 들으라고, 미국사람 들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팔아가면서 뭐를 했습니까? 그렇게 한 줄 몰랐습니다. 저 안산이라는 곳도 보니까 쉼터를 지어 놓고, 화려하게 지어놨습디다. 그래서 윤미향 대표, 위대한 대표 그 아버님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거 엄청나게 나오던데 그거는 다 검찰에서 밝힐 겁니다. 이 죄를 모르고 아직까지도 큰 소리 하고 있는 이 사람들, 죄는 지은 대로 갑니다. 꼭 이 죄를 물어서 죄를 살려야 합니다. 살린다고 제가 마음이 편한 건 아닙니다. 고쳐야지요. 이 후에 두 번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무슨 말씀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이걸 밝히기 위해서, 정말 너무 여러분들이 오셨는데 그 장소가 좁습디다. 여러분들 다 오셔가지고 안가시도록 하기 위해서 장소를 바꿨습니다.
여러분들 기자 여러분들, 부탁드립니다. 꼭 했던 말 그대로 해주세요. 없는 말 추측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것을 다 옳은 말씀으로 기자를 내 주셨으면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
[MBN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