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임성일 기자] 불길은 거침이 없었고 걷잡을 수도 없었다. 마치 잡아먹을 듯 기세 좋게 끓어올랐다. 그런데 완전연소 직전에 ‘휙’하고 꺼져버렸으니 허망함에 뜨거운 눈물이 쏟아진 것도 이상할 게 없던 상황이다.
몸으로 행한 이들도 마음으로 함께 뛴 이들도 마찬가지 감정이었다. 너무도 아쉬웠던 결과다. 그래서 더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 보랏빛 극장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1부리그 팀(수원삼성)과 2부리그 팀(FC안양)이 맞붙는 FA컵 32강 매치업 중 하나였으나 안양의 축구팬들에게는 10년 기다림의 간절함이 담긴 한판이었다.
지난 2004년, 안양LG가 서울로 떠나면서 1번 국도 고개 ‘지지대’를 사이에 둔 안양과 수원 두 도시의 ‘축구클럽 전쟁’은 생각지도 않게 종전이 돼버렸다. 현재 FC서울과 수원삼성, 수원삼성과 FC서울의 만남을 일컫는 ‘슈퍼매치’의 모태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랬던 지지대 더비가 FC안양이 2부리그(K리그 챌린지)에 참가하면서 부활의 가능성을 싹 틔웠다.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했다. 수원이 2부리그로 떨어지거나 FC안양이 1부로 승격되면 만날 수 있지만 쉽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K리그 클래식을 대표하는 강호 수원삼성이 강등의 철퇴를 맞는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올 시즌 K리그 챌린지 6경기에서 승점 5점을 획득하는데 그친 FC안양이 승격하는 확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다. 그런데 FA컵이 다리를 놔주었다. 추첨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상대가 됐다. 운명의 장난처럼, 2013년 5월8일 ‘지지대 더비’가 부활했다.
사실 매치업이 성사됐다는 자체로도 극적이었다. 하지만 경기 내용과 결과에 비하면 예고편에 불과했다. 주전들에게 대거 휴식을 주면서 1.5군을 내보냈다고는 해도 거함 수원을 상대하는 FC안양의 경기력은 전혀 손색없었다.
단순히 버틴 것이 아니라 잘 싸웠다. 잘 싸운 정도가 아니라 이길 뻔했다. 후반 7분 선제골을 넣었고 그것을 잘 지키면서 종료 직전까지 끌고 갔다. 모두가 그렇게 끝날 것이라는 예감으로 가득할 때, 거짓말 같은 일들이 펼쳐졌다. 후반 43분 자책골로 동점, 그리고 추가시간에 터진 서정진의 결승 역전골로 승리는 수원삼성의 것이 됐다.
공을 걷어낸다는 것이 그만 빗맞아 자책골이 된 안양의 수비수 정현윤은 고개를 떨군 채 끝내 눈물을 보였다. 과거의 역사를 알기에, 잃어버린 10년 세월 동안 사무치게 축구가 그리웠을 팬들의 마음을 알기에 쏟아질 수밖에 없었던 뜨거움이다. 하지만 팬들은 울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안양의 팬들은 경기장을 떠나지 않은 채 목청껏 응원가를 불렀다. 아주 붉어서, 붉다 못해 자색(보라색)이 됐다는 FC안양 서포터들
너무도 아쉽게 패해서 오히려 더 진한 잔상이 남았다. 2013년 5월8일 안양종합운동장의 뒷맛은 그러했다. 이 아쉬움은, 분명 FC안양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들의 역사는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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