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윤진만 기자] 스코어 3-0, 시간은 후반 41분. “경기 끝”이라고 누군가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자메이카전, 울리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은 두 수비수 장현수와 박주호를 호출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지시했다. “제로, 제로!”
두 수비수는 4분 남짓 각각 수비형 미드필더와 왼쪽 수비수 포지션에서 ‘제로(Zero)’를 위해 뛰었다. ‘제로’는 문자 그대로 ‘0’이다. 수비수에게 ‘0’은 곧 무실점. 친선경기이고, 사실상 경기가 기운 상황에서도 슈틸리케 감독은 무실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경기를 3-0으로 마치고 나서야 감독은 웃었다.
지난 16일 ‘MK스포츠’와 인터뷰에서 수비수 장현수(24, 광저우R&F)는 “감독님께서 저를 불러 ‘들어가면 수비 열심히 하라. 수비수 앞에서 공중볼 많이 따내라. 그리고 무조건 제로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당시 순간을 떠올렸다.
제로는 슈틸리케 감독의 입버릇 중 하나다. 지난해 9월 부임해 자메이카전전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수비수들 입장에선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고.
↑ 태휘, 이번에도 제로야. 말 안 해도 알지? 사진=MK스포츠 DB |
장현수는 "감독님께서 ‘제로’를 많이 강조하신다. 대략 후반 25분 전후 (곽)태휘형에게 무실점의 중요성을 주입한다. ‘식스 미닛, 제로 제로’ 이런 식이다. 직접 얘기할 때도 있고, 통역을 통해 전달할 때도 있다. 선수들은 그 얘기를 듣고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제로가 미치는 영향에 관해 설명했다.
‘제로’는 곽태휘나 벤치에서 가까운 측면 수비수의 입을 통해 동료들에겐 ‘힘내자’, ‘더 집중하자’로 바뀌어 전파된다. 결과가 나오고 있으니 말의 힘은 생각보다 강렬한 것 같다.
장현수는 “우리 팀은 열 골을 넣든 스무 골을 넣든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쳐야 한다. 2-1, 3-1 승리는 찝찝하다. 감독님께서 특히 그런 결과를 싫어한다”며 팀에는 무실점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했다고 했다.
이러한 무실점 주문은 올해 열린 17경기 중 14경기에서 골을 내주지 않은 주배경으로 꼽힌다. 10월8일 쿠웨이트와의 월드컵 2차예선 4차전에서 한국은 후반 막바지 수차례 실점 위기를 내줬으나, 골키퍼와 수비수들 모두 끝까지 집중한 덕에 1-0 승리를 지켰다. 아시안컵 이라크전, 우즈베키스탄전 동아시안컵 북한전, 중국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역시절 레알 마드리드와 독일 대표로 활약한 명수비수 출신 슈틸리케 감독은 훈련 과정에서 수비 포지션에 대한 요모조모를 직접 지시한다. 기본 1시간 미팅을 각 선수의 단점 지적과 상대팀 분석에 할애한다. 주로 수비수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상대 공격진이 제 플레이를 하지 못하게 할지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 장현수는 지금의 대표팀이 "질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사진=MK스포츠 DB |
경기 전 그는 수비 스페셜리스트이자 전술가이자 분석가이지만, 경기 중에는 동기부여 전문가로 변신하여 제로와 같은 꼭 필요한 말만 전달한다. 결과는 선수 하기 나름이고, 자신은 꼭 필요한 목소리만 경기장 안으로 내던질 뿐이다.
장현수는 “슈틸리케팀은 엄격함 속에 자유로움이 잘 어우러졌다. 감독님께서 짧은 시간 동안 조직력을 극대화하는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이 팀에 있으면 질 것 같은 생각이 잘
올해 14경기 무실점에서 비롯한 최근 11경기 연속 무패(8승 3무)는 엉겁결에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다. 전술적 정신적으로 무장한 장수의 빈틈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슈틸리케팀이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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