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기자] 폭풍 같은 ‘1박2일’ 후에 남은 것은 켜켜이 쌓인 사과문들이다.
프로야구의 뿌리를 뒤흔드는 승부조작 파문과 팬들의 신뢰를 배반하는 ‘도박스캔들’의 후폭풍이 리그를 강타한 20일 저녁부터 21일까지, KBO와 관련 구단, 선수단체들의 사과문과 성명서가 쏟아졌다.
매번 ‘뼈를 깎는 반성’이 있었지만, 선수들의 사고는 계속돼왔다는 허탈감 속에 이번에도 야구팬들은 릴레이 사과문들을 받아 읽었다. 어쩐지 여러 번 본 듯한 낯익은 문구 속에서 ‘진짜 변화’의 씨앗을 찾을 수 있을까.
↑ 이태양의 승부조작 기소 임박이 알려진 20일 사과문을 발표했던 NC는 21일 구단 홈페이지의 홈 화면에도 사과문을 띄워 팬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전했다. 사진=NC다이노스 홈페이지 캡처 |
선수단에 대한 부정행위 방지교육을 맡고 유사행위를 감시하는 ‘윤리감사관’ 제도를 구단 내에 신설하겠습니다.
승부조작에 가담한 이태양(NC)의 구단 NC는 지난 20일 밤 이태양의 기소 임박 보도가 나간 직후 준비된 사과문을 냈다. 이태양의 즉각 계약해지와 구단의 징계 자청, 반성으로 채워진 깔끔한 사과문의 말미에 ‘윤리감사관’ 신설의 약속이 담겼다.
이제까지 ‘교육’ 중심이었던 선수단 인성 지도의 무게중심을 적극적인 ‘관리’ 쪽으로 확대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리그와 각 구단의 지속적인 교육 강화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일탈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에이전트제도가 없는 KBO에서 각 선수들에 대한 보다 세심한 관리, 자문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자문 수요를 채워주는 시스템의 보강은 시도해 볼 만하다.
NC는 우선 김종문 운영본부장과 변호사 출신의 프런트 간부직원 등 두 명에게 윤리감사관을 맡길 계획이다. 향후 외부강사, 전문가 등의 추가 영입 가능성도 있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 – 구단별 법률조력자 지정
범죄 등에 노출되어있고 법의식이 없는 선수들이 언제나 법적 조력을 받고 범죄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각 구단별 법률조력자를 지정하여 운영하도록 하겠다.
4년 전의 재앙이 있었음에도 다시 발생한 승부조작이어서 선수들에게 쏟아지는 원망과 질책이 가장 거세다. 선수협은 21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에 사과문을 냈다. 선수협의 과거 사과문들보다 내용도 길어졌고 구체적인 표현에 노력하면서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였다.
구단별 법률조력자 지정은 선수협 역시 선수들에게 관리-지도-자문 역할을 맡아줄 조력자가 부족함을 인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NC의 윤리감사관 제도 신설과 문제해결 방향에서 ‘교집합’이 있다.
’검은 유혹의 온상인 스폰서 문화의 현실을 선수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말로 ‘스폰서문화’를 언급한 것은 선수협이 현 선수들의 문제를 구체적이고 근본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그러나 ’자체 신고센터를 운영하여 경기조작과 관련된 내용이 입수되는 대로 KBO와 수사기관에 제보하겠다’는 공약은 실효성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
▶KBO – 일벌백계의 의지
KBO와 10개 구단 일동은 어떠한 고통과 희생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이번 사건과 연관된 아픈 상처가 더 깊어지고 만연하기 전에 말끔히 소독하고 도려내어…….
KBO의 대국민사과문은 21일 오전에 나왔다. 하룻밤 새의 고민과 고통이 담겼지만, 구체적이거나 신선한 대책은 없었다. 규약개정과 교육강화 등의 각종 대책을 이미 수많은 선행사례에서 소모해온 KBO에겐 뾰족하게 새로운 묘안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제대로만 실천된다면 가장 강력하고 힘 있는 대책이 될 수 있는 약속은 포함돼있었다. ‘KBO와 10개 구단 일동은 어떠한 고통과 희생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말끔히 소독하고 도려내겠다’고 했다. 선수들의 일탈 사고가 터질 때마다 KBO와 10개 구단은 자주 ‘솜방망이 처벌’ 논란에 휘말리곤 했다. 특히 주력선수가 연관될 경우 ‘감싸기’ 의혹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한 구단의 전략적 계산이 나오면, 동료 구단들의 삐뚤어진 동업자의식이 발동하면서 10개 구단 사장들로 구성된 KBO 이사회의 판단까지 대동소이해지는 실망스런 연쇄효과가 적지 않았다.
일관성 없는 처벌과 솜방망이 처벌이 교체되는 사이에 적절한 대상을 골라 선택되는 중징계는 ‘일벌백계’로서의 효과가 뚝 떨어지고 만다. 각 구단들이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구단 이기주의를 버리고 선수들에 대한 징벌체계만 바로 세워도 해이한 선수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근본적인 교육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팬들의 한목소리다.
↑ 한은회(회장 이순철)는 직설적인 어조로 현역 선수들을 꾸짖는 성명서를 내면서 야구계의 위기감을 강조했다. 사진=MK스포츠 DB |
인기에 취한 너희들의 안하 무인한 행태들에 후배들은 설 곳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라.
한은회는 창원지검 특수부의 승부조작사건 수사 브리핑 이후인 21일 오후 3시가 넘어서 성명서를 냈다. 선수가 승부조작방법을 브로커에게 문의,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제안했다는 충격적인 발표로 야구계가 거의 그로기 상태에 몰린 시점이었다. 팬들에 대한 사죄는 대여섯 줄로 줄이고 후배 현역 선수들에게 작정한 ‘쓴소리’를 퍼부었다. 21세기의 KBO 리그에서 뛰고 있는 ‘행복’과 ‘행운’에 감사하지 않고 ‘스스로 복을 걷어차는’ 안하 무인한 선수들의 행태를
KBO와 구단의 지속적인 교육, 언론의 따가운 비판, 팬들의 아우성으로도 붙들 수 없던 선수들의 책임감을 노선배들의 준엄한 훈계로 다잡을 수 있을까. 크게 기대되지 않지만 어쩐지 믿어보고 싶은 ‘형제유친’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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