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 천재’ 신유빈, 사상 첫 ‘중졸 실업 선수’
재능 살리기 위해 고교 3년 과정 건너뛰어도 괜찮나
스포츠계에 학력 경시 풍조 번질 우려
세계챔피언 이에리사 양영자도 고교과정 모두 이수
문제점 부작용 지적하는 미디어는 한 군데도 없어
탁구협회 대한체육회 문체부도 ‘나 몰라라’
[MK스포츠] 교육학(Pedagogy) 용어 가운데 필수 고교 교육과정(Required High School Curriculum)이란 말이 있다. 인생에서 3년간의 고등학교 코스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게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6일 대한항공 여자탁구단이 올해 여중을 졸업한 ‘탁구 천재’ 신유빈(16)의 입단을 공식 발표한 것은 의외였다. 이와 관련, 네이버에 올라있는 국내 신문, 방송, 통신, 인터넷신문 등 29개 매체는 한결같이 ‘신유빈이 스포츠사상 첫 ’중졸 실업 선수‘가 됐다’며 최연소 탁구 국가대표인 그의 천재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대한항공의 발표 내용과 선수의 재능, 그간 실적 등 팩트 위주의 사실 보도에 지면과 시간을 할애한 것. 고교 3년 과정을 건너뛰고 실업팀에 입단함으로써 선수 본인이나 탁구계, 나아가 학교체육에 끼칠 문제점이나 악영향에 대해 언급한 미디어는 한 군데도 없었다. 한국중고탁구연맹 등 탁구계와 대한체육회, 문화체육부 등 관계기관도 학력 결손으로 인한 당사자의 평생 불이익이나 스포츠계에 번질 수 있는 학력 경시 풍조 등 부작용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교육은 인간의 타고난 잠재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그 과정은 사람을 사람답게, 사회를 사회답게 가꾸는 국민 조형력(造形力)을 가진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정의가 무색한 형국이다. ‘사라예보의 신화’를 쓴 이에리사(66), 서울올림픽 우승 주역 양영자(56) 등이 활약했던 1970년대와 80년대만 해도 국가대표급 유망주들이 중고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마치고 실업팀에 입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가치관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달라진 것을 필자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도쿄올림픽 본선 진출권 따낸 차세대 에이스
↑ 우리나라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중졸 실업선수’가 된 ‘탁구 천재’ 신유빈. 사진=국제탁구연맹 홈페이지 |
특히 신유빈은 지난 1월 27일 포르투갈 곤도마르에서 열린 국제탁구연맹(ITTF)의 도쿄올림픽 단체예선 2라운드 프랑스와의 패자부활 결승에서 첫 번째 복식과 네 번째 단식을 모두 이겨 한국의 도쿄올림픽 본선 단체 출전권을 따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신유빈은 수원 청명중에 재학 중이던 지난해 이미 고교 진학 대신 실업팀으로 직행할 마음을 굳혔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아버지인 신수현 수원시 탁구협회 전무는 “유빈이가 탁구에 매진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학교 책상에 앉아 있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해 결국 유빈이 뜻에 따르기로 했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신유빈의 실업행은 삼성생명을 제외한 4개 여자 실업팀이 경쟁을 벌인 끝에 결국 그에 대한 타업체의 개인 후원을 허용한 대한항공이 영입에 성공했다고 한다.
대한항공은 “신유빈이 탁구 기량뿐만 아니라 교양과 인성을 갖춘 탁구인으로 성장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영어와 중국어 등 외국어 수강을 지원하는 등 신유빈의 학업 손실을 메꿀 수 있도록 배려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라예보의 영웅’ 이에리사도 서울여상 졸업
하지만 1973년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구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 여자단체전에서 중국 일본 등을 연파하고 한국 구기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에리사와 비교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이에리사는 15세였던 서울 문영여중 3학년 때인 1969년 제23회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여고, 대학, 실업의 선배들을 모두 꺾고 우승한 뒤 1975년 제29회 대회까지 이 대회 여자 개인 단식 7연패의 위업을 이뤘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70년 서울여상에 진학한 이에리사는 재학 중 아시아선수권대회(10회, 11회) 세계선수권대회(31회) 스칸디나비아 오픈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당시 한상국 교장으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었다. 1973년 2월 서울여상을 졸업한 이에리사는 2개월 뒤 정현숙 박미라 등과 함께 ‘사라예보의 영광’을 연출했으며 1977년까지 현역선수로 활동했었다. 그는 1990년대에 명지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태릉선수촌장, 용인대 교수 등을 거쳐 19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1987년 뉴델리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복식에서 현정화와 짝을 이뤄 금메달을 땄던 양영자는 어떤가. 그 역시 전북 익산의 이일여고를 졸업한 뒤 박성인 감독의 제일모직에 입단했지만, 당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이일여중 시절부터 선배들을 제치고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던 양영자도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1981년 이일여고 2학년 때 3학년 과정을 건너뛰어 1982년 제일모직에 입단할 예정이었다. 이때 천영석 감독이 이끌었던 금융팀 산업은행 또한 양영자와 이일여고 동급생이었던 박나리의 입단을 확정 지은 상태. 하지만 여타 실업탁구팀 감독들은 제일모직과 산업은행의 스카우트가 비정상인 것을 알면서도 해당 감독들이 모두 거물급이어서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 채 가슴앓이만 했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같은 사실을 체육면 사이드 톱으로 보도했고 체육 주무부서인 문교부(장관 이규호) 체육국이 진상조사에 나서 제일모직과 산업은행의 변칙 스카우트는 제동이 걸렸다. 결국 양영자 박나리는 1983년 여고를 졸업한 후에야 제일모직과 산업은행팀에 입단할 수 있었다.
문체부, 대한체육회가 제도적 장치 마련해야
이러한 전례가 있는데도 탁구계는 대한항공이 탁구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의식해서인지 신유빈의 실업팀 직행에 대해 되도록 언급을 삼가는 분위기다. 윤정일 한국중고탁구연맹 전무이사는 신유빈의 진로 결정에 대해 “우리나라 의무교육은 중학교까지다”고 전제하고 “신유빈이 고교 대신 실업팀으로 간 것은 개인의 선택인 만큼 연맹으로선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한 고교탁구지도자는 “국내 약 20개의 여고 탁구팀이 있는데 신유빈이 고교에 진학했다면 선의의 경쟁을 통해 여고 탁구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문제는 앞으로 탁구는 물론 다른 종목에서도 제2, 제3의 신유빈이 나오지 않도록 대한체육회나 문체부가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