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그렉시트) 운운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무서운 사나이로 불리던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 그가 20일(현지시간)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이날 국영방송 ERT를 통해 생중계된 연설에서 “1월 25일 국민으로부터 받은 권한이 한계에 달했으며 이제 그리스 국민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20일은 유럽재정안정화기구(ESM)을 통한 3년간 860억 유로 규모의 3차 구제금융지원금 지급이 시작된 날이다.
그가 7개월만에 총리직에서 사임함에 따라 그리스는 다음달 20일 조기총선을 치룬다.
사실 그리스의 조기총선은 어느 정도 예고돼 있었다. 전문가들은 치프라스 총리가 3차 구제금융 협약을 마무리하고 첫 분할금을 받아 유럽중앙은행(ECB)에 부채를 상환하면 신임투표나 조기총선을 제안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연립정부 다수당 시리자의 대표인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달 구제금융 협상 개시에 합의하면서 채권단이 요구한 긴축정책 요구 등을 수용해 당내 강경파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 무려 43명의 당 소속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지며 탈당을 예고한 상황이다. 치프라스 총리의 의회 장악력은 급속히 떨어졌고, 정계개편 없이는 앞으로 긴축 정책을 추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현지 언론들은 치프라스 총리의 전격 사퇴는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도박이라고 분석했다.
그가 이끄는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9월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당내 반대세력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채권단이 요구한 긴축을 강력하게 밀어 부칠 수 있게 된다. 이는 채권단과 협상에서 ‘백기투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서 치프라스의 인기가 높게 유지되는 모순된 상황 때문에 가능한 도박이다.
치프라스 총리와 시리자의 지지율은 여전히 높게 유지되고 있다.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그리스 국민들의 63%가 치프라스가 구제금융 협상에 사인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고 답했다. 지난달 구제금융 협상 이후 이뤄진 설문조사에서도 시리자는 33.6%의 지지율을 받으면서 가장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치프라스와 시리자는 ‘굴욕적 협상’을 주도했음에도 왜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걸까. 먼저 그리스 국민들은 치프라스의 구제금융협상을 ‘전쟁에서는 졌지만 도덕적인 승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총리가 그리스 국민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싸웠고 결국 패배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본다. 그리스 채무 탕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국제적인 여론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대안이 없다는 점도 시리자 인기유지의 이유다. 그리스 국민들은 기존 정당들은 경제위기를 불러온 주범이라고 본다. 그나마 새로운 정치세력인 시리자가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파리9대학의 코스타스 버고풀로스 정치경제학과 교수는 “그리스 국민들에게는 치프라스와 시리자보다 나은 대안이 없다”면서 “국민들은 여전히 치프라스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스 제3차 구제금융 지원이 타결되면서 그리스 경제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다. 지원금을 통해 파산 위기에 처한 은행들의 자본확충이 이뤄지면 자본통제 상황이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마비됐던 경제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지난 18일 그리스는 국민들의 해외 송금한도를 월 500유로까지 허용하기로 했다. 현재 주간 420유로인 예금 인출한도도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벗어난 그리스 경제가 반등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20일에도 아테네주식시장은 3.5% 폭락하면서 651.56까지 떨어져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투자자들이 그리스 경제를 어둡게 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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