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절대 맹주’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성지순례 참사 때 일어난 리더십 부재, 유가 하락에 따른 경제추락 등 다양한 이유를 내세워 왕자들이 개혁과 왕권 교체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런 대의명분 뒤에는 후계자 승계 순서를 뒤집은 왕에 대한 불만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왕실 내 ‘권력암투’라는 분석이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스는 23일(현지시간) 사우디의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의 손자라고 밝힌 왕자를 인용해 “압둘아지즈 선왕의 생존한 아들 12명 중 8명이 살만 빈 압둘아지즈(80) 현 국왕을 아흐메드(73) 왕자로 교체하는 데 찬성한다”라고 말했다.
이 왕자는 왕가뿐 아니라 사우디 유력한 성직자 75%도 같은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이 왕자는 “국왕이 바뀌면 억울한 정치사범들이 풀려나고 새로운 개혁을 드라이브할 수 있다”며 “아흐메드는 종교에 충실하지만 마음이 열려 있고 영어와 세계 뉴스를 즐기는 이 시대 인물”이라고 밝혔다.
언론을 통해 말을 흘렸다는 것 뿐이지 현재 권력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쿠데타’나 다름없다는 평가다.
왕권교체 요구가 불거진 도화선은 최근 발생한 성지 순례 압사사고다. 당초 정부는 700여명으로 사망자를 추산해 발표했지만 며칠뒤 이 숫자의 2배가 넘는 1450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고 축소 의혹과 함께 별다른 후속책도 내놓지 못하자 ‘국가 리더십이 없다’는 날선 비판들이 쏟아졌다.
유가 급락에 따른 재정 축소도 젊은 왕자들과 귀족세력의 불만에 기름을 붓고 있다. 지난해 6월 배럴당 110달러 선까지 치솟았던 국제유가는 현재 50달러 선으로 반토막 났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살만 국왕은 왕실에 “귀족들과 공무원들은 즉각 자동차와 가구 구매를 중단하고 출장경비, 인프라 투자를 대폭 삭감해야 한다”는 재정축소 계획을 하달했다.
그러나 아흐메드 왕자를 비롯해 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그간 수억원대 고급 스포츠카를 관용차로 이용하고 순금 왕실 인테리어까지 하면서 소비가 최고 미덕이라 강조했던 국왕이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며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살만 국왕과 아흐메드 왕자간 본격적인 갈등은 지난 1월 살만 국왕 부임 이후 그간 왕위 계승원칙이었던 ‘형제상속’을 깨뜨리면서 시작됐다. 사우디 왕가의 형제상속 원칙에 따르면 살만 왕은 자신의 형제인 아흐메드 왕자를 왕세자로 임명해야 하는데 이를 깨고 조카인 나예프 왕자를 왕세자로, 부왕세자엔 자신의 아들인 모하메드를
자신의 차례만 평생 기다려온 아흐메드 왕자를 비롯해 그의 추종세력이 하루아침에 ‘닭쫓던 개’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흐메드 왕자의 대표 지지세력에는 사우디 전 정보국장인 투르키 파이살 사우드 왕자와 억만장자인 알왈리드 빈 탈랄왕자가 있다.
[이지용 기자 / 이유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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