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0여년도 훌쩍 지나버린 지난 1944년. 대구직업학교(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18세 청년 선태수씨는 꿈많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 해 1월20일 일본군의 포차에 강제로 실린 뒤 일본 규슈 가고시마현 행 배를 타면서 소박한 꿈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광복직전까지 1년6개월간 낮이면 해군 정비부대에서 힘겨운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밤이면 ‘조센징’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군으로부터 갖은 학대에 시달렸다. 그는 “힘든 노역 속에서 일본인 교관 눈밖에 나면 내무반 전원이 밥을 굶고 얼차려 받는 게 다반사 였다”고 말했다. 미군 폭격이 갑자기 떨어지면 동료들 시신이 사방으로 조각나 튀었고 이런 공포를 이기지 못해 끝내 스스로 목을 멘 고향동료도 많았다.
그의 삶은 해방이후에도 순탄치 않았다. 억울하게 일본군부대에서 강제노역을 했음에도 단지 일본제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에선 마치 ‘매국노’ 취급하는 냉랭한 시선도 많았다. 또 대부분 심각한 전후 휴유증을 겪었던 탓에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버거웠다.
선씨처럼 강제로 군부대에 징용되거나 일본 군수기업에 징용돼 착취당했던 노동자는 무려 800만명에 이른다.
지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약 이행에 따라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았던 한국 정부는 강제징용 사망·부상 피해자들에게 1인당 30만원씩 위로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 때 혜택을 받은 이들은 전체 피해자의 10%에 남짓한 8500여명에 불과했다. 일본이 내놓은 돈 중 3억 달러(약 3300억원) 가운데 단 24억원만 징용 피해자들에게 돌아갔고 나머지는 국가 기간산업 육성에 사용됐다.
뒤늦게 정부는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마련해 지난 2008년부터 강제징용 피해자 신고를 다시 받아 총 11만3000여 건을 접수했다. 이중 피해가 입증된 7만3000여명에게 위로금이 지급됐다. 강제징용 중 사망자는 2000만원, 부상자는 장해 수준에 따라 300만~2000만원씩 유족들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모든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관계자는 “강제노역으로 인한 부상임을 직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전체 부상자의 단 0.1%만이 위로금을 지급받았다”고 설명했다. 선 옹처럼 외형적 부상이 나타나지 않은 경우 아예 위로금 신청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뜻이다.
선 옹과 같은 생존자들이 정부로부터 받고 있는 것은 ‘의료지원금’ 명목으로 1년에 한번 80만원이 전부다. 그나마 2008년 당시 2만5000명이었던 생존자 수는 2016년 현재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나이가 들어 매해 수천명씩 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현재 평균연령은 약 90세다.
선씨는 “보상은 둘째치고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월급’이라도 다시 되찾았더라면 우리 같은 강제노역 피해자 삶이 이렇게 피폐해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제노역자들의 임금은 복무 당시 일본 은행에 강제적으로 공탁됐고 해방후엔 대다수
선옹은 “질긴 목숨이 지금 껏 살아 남아 또 한 해를 맞았지만 누구도 우리가 지옥 같은 곳에서 겪었던 피해에 대해선 더이상 말하지 않고 있다”며 “우리도 ‘위안부 할머니’들 처럼 일제의 강압에 의한 또다른 비극적 역사의 ‘피해자’임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꼭 인정하고 사과를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연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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