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자본주의의 총아인 미국에서 자사주 매입(Buyback)의 적정성에 대한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대표적인 주주 환원 수단인 자사주 매입은 상장기업이 자사 주식을 사들여 시중에 유통되는 주식 수를 줄여 주가 상승을 도모하고 주당순이익(EPS)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지난 달 미국 경제방송인 CNBC가 페이스북 전 부사장이자 투자회사 소셜캐피털의 최고경영자(CEO)인 차마스 팔리하피티야와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자사주 매입 문제가 논쟁을 일으켰다.
팔리하티피야 CEO는 CNBC 앵커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영 위기에 처한 미국 항공업계에 정부가 250억 달러(30조6670억원)를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항공기업을 지원하지 않고 실패하도록 놔둬야 하느냐?"고 묻자 주저없이 "그렇다"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 지원의 필요성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와 미 의회의 초당적 합의가 이뤄진 이슈에서 도발적으로 "지원하지 말라"고 반기를 든 것이다.
그는 기업 경영진과 이사회가 대주주인 헤지펀드와 기관투자자들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사주 매입과 주주배당이라는 쉬운 길만 선택해왔다며 이를 구제하는 데 납세자의 희생이 수반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매년 막대한 현금 자산이 이들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동안 재정적 파탄이 초래돼도 미국 납세자들로부터 막대한 구제금융을 얻어 좀비기업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팔리하티피야 CEO는 "이는 미국 기업의 지속가능한 생태계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기업 경영진은 단기에 이해관계자들의 마음을 얻는 데 투자하지 않고 초과 현금을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초과 현금을 자사주 매입보다 미래 기술·서비스 투자에 집중하는 아마존의 제프 베이저스 CEO가 워런 버핏보다 더 뛰어난 '세기의 투자자'라고도 했다.
당시 CNBC 앵커와 전화 통화 내용이 SNS를 통해 회자되고 막대한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다른 지식인들도 자사주 매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동참했다.
스캇 갤러웨이 뉴욕대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미국 항공사들은 지난 2000년 이후 66차례나 파산 선언을 했다"며 "이 과정에서 6대 항공사의 이사회와 CEO들은 현금 흐름의 96%를 자사주 매입에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사주 매입의 위험성을 알고도 주주 보상과 경영진 보수에 몰두한 이들이 지금 정부 구제금융 보조금(Bailout)을 원하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팔리하티피야 CEO는 팬데믹 전까지 넘쳐나는 초과현금을 자사주 매입에 썼던 기업들이 이제는 근로자 처우 개선과 미래 위험에 대비하는 불황 대비 펀드(Rainy day fund)를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UC버클리 정책대학원 교수도 최근 자사주 매입 반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라이시 교수는 "월마트, 맥도널드 등 많은 대기업이 아직도 자신의 직원들에게 유급 병가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며 "기업들이 (이런 처우 개선 문제는 외면한채) 하루빨리 근로자를 투입해 공장이 재가동되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그는 "평시 상황에서도 이런 열악한 처우는 심각한 문제인데 팬데믹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는 도덕적으로도 매우 불쾌한 문제"라며 "단 1센트도 납세자의 돈에서 나가는 구제금융 지원금을 이들 기업에 써서는 안 된다"고 거칠게 주장했다.
미국을 비롯해 천문학적 구제금융 지원을 진행 중인 각국 정부도 시장의 이 같은 논쟁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과 영국은 구제금융 지원 대가로 자사주 매입 금지와 해고 금지, 경영진 급여 동결 등을 내걸었다. 스웨덴의 경우 조세회피처에 법인을 설립하고 납세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은 기업은 구제금융을 받을 수 없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월스트리트 금융기업들의 '대마불사(Too big to fail)’ 논란이 있었다면,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는 메인스트리트(실물경제)에서 기업의 자사주 매입이 국가 경제를 살찌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부상하는 흐름이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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