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주화 3종, 당시 화폐제도 붕괴됐던 이유보니?
↑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주화'/사진=네이버 캡처 |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주화 3종'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주화가 화제인 가운데 당시 화폐제도가 붕괴된 이유가 누리꾼의 이목으르 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주화는 1888년(고종 25년) 경성전환국에서 발행한 1원 은화, 10문 적동화, 5문 적동화 3종입니다.
이들 주화에는 '개국 497년'이라는 연호가 들어가 있고 주화의 앞면 상부에는 태극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또한 좌우에는 이씨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나무 가지가 교차되어 있고 뒷면 중앙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쌍룡이 그려져 있어 일본 주화와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폐제도는 사실상 거의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1876년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어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했음에도 당백전, 당오전이 남발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항지마다 외국의 화폐들이 범람했고 당시 세계 여러 나라 금본위(金本位)제도나 은본위(銀本位)제도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상평통보는 국제시장에서 가치가 빈번히 변동하는 동(銅)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안정된 가치를 지니지 못했고, 운반이나 사용 등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불편이 따랐습니다.
때문에 신식
하지만 최초의 전환국은 제조기술과 기술인력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근대적인 화폐를 제조하지 못했으며 국가재정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당오전의 발행만을 담당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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