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은 모든 걸 처음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쏠쏠한 재미가 있고, 재연은 보다 완성도 있는, 업그레이드 작업을 통해 배우 스스로 한층 성숙해지는 기회를 얻는 것 같아요. 처음 만난 ‘조지’는 뭐랄까, 그저 멋지고 세련된 느낌이었다면 다시 만난 ‘조지’는 가정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믿음직한 ‘남편’의 기운이 강했어요. 좀 덜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의 향기는 훨씬 깊어졌다고나 할까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하하!”
다시 돌아온 고영빈표 ‘조지’가 어딘가 달라졌다. 겉모습은 여전히 훤칠하고 말끔하다. 또 섹시하다. 그런데 분위기는 뭔가 다르다. 전작 ‘프리실라’에서 한껏 여성의 마음을 이해하고 온 덕분인지, 아내 ‘앨빈’을 대하는 ‘조지’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어딘가 많이 달라졌다는 인사에, 그는 “예리하시네요?”라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어 “연습 초반엔 ‘프리실라’ 버나뎃의 그림자가 남아있어 여성스러운 행동이 자꾸만 튀어 나왔어요. 조지가 너무 앨빈스러운거죠”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고영빈은 전작 ‘프리실라’에서 퇴물이 돼버린 왕년의 드랙퀸(Drag Queen, 여장남자) 스타 ‘버나넷’을 연기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라카지’로 현직 트랙퀸 스타 ‘앨빈’의 남편인 ‘조지’ 역을 맡았다. ‘조지’는 카리스마와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모두에게 존경 받는 클럽 ‘라카지오폴’의 주인이다.
연이어 ‘게이’를 맡아, 선입견에 대한 부담감이 없냐고 물었더니 “전혀요”라고 답했다.
“성 소수자들의 이야기에 대한 관객들의 시선이 예전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소재만으로도 공연을 볼지 말지를 고민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일단 보고 판단하자’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들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거부감을 갖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만의 유쾌한 성격과 장점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위기랄까요? ‘우리와 다를 뿐, 무조건 나쁜 게 아냐’라는 성숙된 의식이 생겨난 것 같아요.”
국내에는 지난 2012년 초연돼 개막과 동시에 폭풍적인 호응을 얻으며 그 명성을 입증했다.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라카지’는 초연 멤버인 정성화 김다현 나경주 고영빈 전수경 유나영 김호영과 함께 이지훈 송승환 이경미 최정원 등이 새롭게 합류하면서 더 강력한 무대를 완성했다.
사실 불과 5, 6년 전만 해도 생소하기 그지없던 소재였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의 유행 장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 같은 유행, 분위기는 ‘라카지’ 같은 명작이 이끌어낸 진한 감동 덕분”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라카지’는 성 소수자들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가족 이야기로 마무리 짓기 때문에 공연이 끝나면 누구나 따뜻한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돌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젊은 관객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보러 왔다가 오히려 부모님에게 보여드리고 싶다는 경우가 많아요. 그만큼 스토리가 감동스럽고,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잘 구성돼 있어요. 이런 명품 공연을 2번이나 참여할 수 있다는 건 큰 영광이죠.”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인기과 명성이 함께 커져, 조금은 변했을 법도 한데 이전, 아니 그 이전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때 보다 더 겸손해졌다. 답변 하나 하나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배우도 흐르는 세월과 함께 나이도 먹고, 작품 수도 늘잖아요? 그럼 이에 걸맞는 깊이가 필요한 것 같아요. 무대에 오르면 오를수록 더 떨리고 욕심이 나는 이유이기도 해요. 이번 ‘라카지’에서는 겉으로 풍겨지는 멋보다도 아이를 가진 아버지로서, 슬픔에 빠진 아내를 보다듬는 남편으로서의 성숙함을 더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런 걸 사람의 향기라고 하죠?”
그는 유난히 도전을 즐기는 배우다. ‘노력파’인 동시에 ‘모험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초연’에 대한 관심이 유독 남다르고, 연기에 대한 연구는 끈질기다.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잡기까지 이 두 가지 덕목이 줄곧 함께 했다.
“‘초연’을 통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고, 그 영향력이 재연으로 이어지기는 건 배우로서 엄청난 뿌듯함을 안겨주는 일인 것 같아요. 많은 작품들이 다 저마다의 색깔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이 녹아있는 ‘삶’이 담긴 이야기를 좋아해요.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거나, 그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작품은 아직까지는 크게 끌리지 않아요.”
“제 인생의 가장 의외의 작품이랄까요? 모든 통념을 넘어, 그냥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설득을 당했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뱀파이어’라는 캐릭터 자체가 배우로서 한번쯤 꼭 해보고 싶은 아주 오묘한 분위기를 지녔잖아요. 제가 언제 또 이런 역할을 맡겠어요? 배우 인생의 일탈과도 같죠. 하하!”
작품, 캐릭터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게 없는 선택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이 같은 호탕함에 그는 언제부턴가 뮤지컬계 ‘변화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이에 “그냥 단순해서 가능 한 것”이라고 했다.
“공연이 끝나면 이전 기억을 까먹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재연임에도 불구, 처음 들어갈 때 대본을 한참을 잡고 있어요. 스스로 새로운 느낌이, 이번에 내가 해야 할 임무를 명확히 파악하고 나면 그 다음엔 쉽게 불이 붙어요. 그전까지는 매번 처음인 작품처럼 낯설어하죠.”
10년 전에도 그는 그랬다. 남들 보다 앞서가려고 하는 욕심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섬세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10년 전 오늘의 자신의 모습을 예상했냐는 질문에 “다른 건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적어도 무대에 서있는 모습을 늘 꿈꿨던 것 같다”고 답했다.
“‘어떤 배우가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녔을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희한하게 아무것도 기억나질 않아요. 다만, 그때도 분명 무대 위에 있는 나를 상상했어요. 그 모습을 간절히 원했던 것 같아요.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나를. 10년 후요? 역시나 무대 위라면 좋겠어요. 그거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욕심이 있다면, 지금 보다는 10년 만큼의 내공을 지닌 성숙함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요. 하하!”
한편, 고영빈이 출연하는 뮤지컬 ‘라카지’는 3월 8일까지 강남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그는 ‘라카지’를 마치는 대로 ‘마마돈 크라이’를 통해 쉼 없이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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