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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자산운용사부터 헤지펀드까지 우리나라 자본시장을 이끌어가는 400여 개 기업의 총대표 격인 권용원 금융투자협회 회장도 이를테면 그런 부류다. 훤칠하게 큰 키에 조근조근 말하는 그는 어느 회의에 가도 제 목소리를 먼저 키우는 법이 없다. 그래서인가 왠지 혁신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체제순응적일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착각은 거기서부터다.
30년간 공직과 민간을 오가면서 업계를 바꿔나간 그를 보면 '조용한 혁신'이란 말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상 어딘가에는 다른 사람이 몰라줘도 조용히 혼자서 물길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노트북컴퓨터를 이용해 주식거래를 하던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모바일을 이용한 거래인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으로 바꿔놓은 것도 그고, 지금은 보편화된 영업점 방문 없이 계좌를 계설(비대면 계좌개설)할 수 있는 서비스를 처음 제안한 것도 그다.
금융투자협회 회장으로 다시 신발 끈을 묶고 있는 권 회장을 보니, 앞으로 3년 후 그가 내놓을 자본시장의 미래가 벌써 기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기술 + 금융 방법을 찾아라
최근 취임 두 달을 맞아 매일경제신문과 만난 권 회장은 "금융투자협회 회장이 뭐 하는 자리인지 잘 알고 있는데도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술금융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말이 빨라진 그는 "금융투자업계가 기술과 금융을 접목해 4차 산업혁명의 파고를 넘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그건 어떤 한 회사의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며 "기술투자도 많이 필요하고 시스템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점도 많아 금융투자업계가 전반적으로 힘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밝혔다.
권 회장이 금융투자협회에 와서 처음 만든 조직이 '디지털혁신팀'이다. 블록체인과 빅데이터 등 신기술을 활용해 금융투자업계가 공동으로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보겠다는 차원이다. 먼저 금융투자업계뿐만 아니라 학계·연구기관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부터 만들었다. 뭐든지 일단 잘 알아보고나서 시작해야지 남들이 한다고 무턱대고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권 회장은 "당장 돈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얼마나 돈이 들지도 모르는 사업을 무턱대고 시작할 수 있는 최고경영자(CEO)는 거의 없다"며 "디지털 혁신이야말로 협회 같은 데서 다함께 모여 길을 찾아봐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10년 CEO 경험이 녹아 있는 얘기다.
권 회장은 4차 산업혁명으로 증권사 애널리스트나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를 인공지능(AI)이 대체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다. 그는 "기술이 앞선 기업들은 실적이 좋으니 유능한 인력을 더 뽑는다"며 "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떻게 다르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4차 산업혁명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까봐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그가 키움증권 사장으로 일했던 지난 10년간 국내 증권업계에는 지점 축소와 함께 감원 바람이 불었지만 키움증권은 오히려 직원을 늘렸다. 키움증권은 2000년 오프라인 지점이 없는 온라인 증권사로 출발했지만 MTS 점유율을 높여 주식 위탁매매 1위로 올라섰다. 다른 증권사들이 영업점을 줄이는 동안 키움증권에서는 정보기술(IT) 인력을 더 뽑고, 상품개발 인력을 더 채용하면서 회사를 키워나갔다.
◆ 대립보다는 화합으로 얻어내야
권 회장은 필요한 게 있으면 시끄럽게 싸워서 얻어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방에게 찬찬히 잘 알아듣게 설명하고 설득해서 얻어내는 사람이다. 남을 설득하려면 일단 내 논리는 물론이고 상대방 논리에 대한 방어 논리도 잘 갖춰야 한다. 그래서 늘 일에 착수하기 전 준비부터 잘 해놓는 게 몸에 배었다. 화합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직생활에서부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협회장이 되자마자 사모펀드지원팀을 신설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는 "지난 1월 협회장 선거 당시 금융투자협회를 업권별로 분리해야 한다며 업권 간 이해상충 부분이 많다는 지적을 들었다"며 "하지만 협회장에 출마하면서 협회 분리를 공약으로 내세운다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권 회장은 오히려 "너무 많은 회사가 갑작스럽게 회원사로 들어오면서 지원이 필요한 곳에 지원이 안 되는 경우도 생겨났다"며 "그런 측면에서 최근 늘어난 전문 사모펀드 운용사를 돕기 위한 신규 조직을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 자산운용시장은 사모펀드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1997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설립된 후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에 자산운용사로 등록한 회사만 214개로 늘어났다. 운용사가 늘면서 일자리도 증가했다. 국내 자산운용사 임직원은 지난해 말 기준 7337명으로 2015년 말에 비해 46% 늘어났다. 덩치는 커졌지만 수익은 크지 않아 회원 분담금으로 운영되는 금융투자협회 입장에서는 풀기 힘든 숙제였다. 권 회장은 이런 점을 적극 수용해 운용업계 목소리가 협회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창구로 이번 조직 개편에 공을 들였다. 신규 창업한 소규모 회원사들에도 협회에서 체계적인 업무지원을 하겠다는 의미다.
◆ 모험자본 따져보고 규제완화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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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작업을 권용원 금융투자협회장이 시작한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시장이 모험자본을 적극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금융당국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지금도 모험자본 공급의 역할을 잘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의문에서였다. 대체 어디까지를 모험자본으로 볼 건지에 따라 따져볼 여지가 크다는 게 그의 논리다.
권 회장은 "정부가 중소·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모험자본 공급을 활성화하고 투자회사로의 역할을 잘해달라고 하는데 우리 금융투자회사들은 이미 이 부분에 상당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다만 우리 스스로 얼마만큼 잘하는지를 계산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부 시책에 호응하고 국가적 과제를 수행하면서 금융회사들이 신뢰를 얻다 보면 우리 입장에서도 금융투자업의 발전을 옥죄는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사실 금융위기 이후 금융투자업계 발전을 억제하는 촘촘한 규제가 많았는데 앞으로 이를 어떻게 풀 것인가가 큰 과제"라며 "최근 원칙 중심 규제에 대해 재검토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금융투자업계는 현행 규정 중심 규제(포지티브 규제)에서 원칙 중심 규제(네거티브 규제)로 바꾸는 규제 완화 노력이 필요하다고 꾸준히 목소리를 키워왔다. 금융투자상품 포괄규제 도입 등을 통해 원칙 중심 규제를 도입해달라고 노력했지만 시행령 등 하위 규정은 여전히 규정 중심 규제의 틀을 유지하고 있어 사실상 달라진 게 없다는 주장이다.
권 회장은 "원론적으로는 잘되지만 각각은 숨을 못 쉬게 힘들게 하는 게 금융규제"라며 "불가피한 규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업계가 현장감을 살리고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서 규제당국을 설득해간다면 규제 완화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벤처로 옮기니 버블 터지고…증권사 갔더니 금융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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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고시에 합격했지만 관료의 길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당시 한국 반도체 산업은 후발주자로 세계시장에서 찬밥 신세였다. 그러나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분위기는 뜨거웠다. '1970년대 중후장대에 이어 반도체를 기간산업으로 키워보자'는 의욕이 넘쳤다. 사무관과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권 회장도 반도체 산업의 초석을 다지는 기쁨을 맛봤다. 2000년 39세의 권 회장은 산업기술개발과장을 끝으로 1세대 벤처기업 다우기술로 옮겼다.
그가 벤처기업으로 옮기자마자 벤처버블은 꺼지기 시작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닷컴버블이 걷히는데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다우기술 미주법인 대표를 시작으로 구조조정 총괄까지 맡으면서 주변에 꺼져가는 벤처신화를 숱하게 봐왔다. 그는 "눈 뜨면 몇 개씩 기업이 사라지니까 그 당시에는 살아남아야겠다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고 회상했다.
위기를 뚫고 다우기술 부사장, 다우엑실리콘 사장, 키움인베스트먼트 대표 등 승승장구하나 싶었는데 2008년 다시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유수의 미국 금융사가 쓰러지자 우리나라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마저 어려워지는 등 금융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그는 키움증권 사령탑을 맡게 됐다. 그게 2009년 4월이다.
권 회장은 "벤처회사에서 닷컴버블 직격탄을 맞고 10년간 힘들게 극복했는데 금융회사 CEO가 되자마자 이번엔 또 금융위기가 온 것"이라며 "그래서 위기에 강한 게 내 운명인가보다 하고 받아들였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렇게 또다시 '서바이벌' 모드에 돌입했는데 10년이 훌쩍 갔네"라며 사람 좋게 웃어넘겼다. 권 회장은 키움증권에서 10년 장수 CEO로 있으면서 소형 증권사에 불과하던 이 회사를 중형사로 키워놨다. 키움증권이 12년간 주식시장 점유율 1위를 놓치지 않았던 성과에 비하면 소박한 자평인 셈이다.
■ 권용원 협회장은…
△1961년 서울 출생 △1980년 서울 광성고 졸업 △1984년 서울대 전
[한예경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