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옥 작가(44)는 희곡이 완성되면 가장 먼저 연출가 김광보 서울시극단장(51)에게 보여준다. 2001년 연극 ‘인류 최초의 키스’로 호흡을 맞춘 후 14년 동안 줄곧 그랬다.
고 작가는 “나보다 더 내 희곡을 잘 알고 있는 연출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김 단장은 그의 대본을 볼 때 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고 작가 특유의 은유와 상징이 많은 희곡을 무대에 형상화하는 과정이 너무 어렵다.
김 단장은 “고 작가 작품은 워낙 좋지만 등장 인물들이 인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드라마가 아니다. 내면의 갈등과 함축적 대사가 너무 많아 무대에 입체화시키는게 힘들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창작의 고통 끝에 찾아오는 희열이 매력적이다. 서울시극단장 취임 후 첫 작품으로 고 작가의 ‘나는 형제다’(9월 4~20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를 선택한 이유다. 2013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폭탄 테러범이였던 러시아 체첸공화국 이민가정 형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현대 사회 폭력의 본질을 파헤친다.
고 작가는 “과거의 폭력은 직접적으로 억압하고 원한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이뤄졌지만 현대 폭력은 다르다. 나와 이념과 종교,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악마화시킨다. 공감과 소통이 안되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짓을 하는게 이 시대 폭력”이라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한국 사회에서 느닷없이 일어나는 돌발적인 사건 사고의 이면이 이 작품의 맥과 닿아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칼로 찌르고 폭행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 소외 받아온 사람들이 사회를 향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테러의 본질과 똑같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 온 두 형제의 성장과 실패를 통해 약자를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그린다.
고 작가는 “보스턴 테러 수단은 압력솥 폭탄이었다. 형제가 쓸쓸하게 쇠붙이를 주으러 다니는 과정을 통해 소외 과정을 표현했다. 일상 관계의 실패와 절망을 주워서 폭탄이 됐다”고 설명했다.
연극계 ‘황금 콤비’로 불리는 두 사람의 협업이 어떤 결과를 빚을지 벌써부터 관심이 뜨겁다. 최근 매진 행진을 기록한 연극 ‘프로즌’와 ‘내 이름은 강’ ‘지하생활자들’ ‘내 심장을 쏴라’ ‘발자국 안에서’ ‘주인이 오셨다’ ‘웃어라 무덤아’ ‘천년전쟁’ 등 창작극 7편과 윤색·각색 작품 10편 모두 화제가 됐다.
김 단장은 “중요한 순간에 믿을 수 있는 작가다. 14년 동안 대본을 수정해달라는 소리를 한 번도 안 했다. 고 작가가 탈고한 첫번째 원고가 곧 완고(完稿)다. 배우들에게는 대사 토씨 하나 고치지 말라고 한다”고 강조했다.
고 작가는 “토씨에 굉장히 신경 많이 쓴다. 배우 입에 맞게 바꾸다보면 의미가 달라진다. 연출님은 철저하게 희곡을 분석한다. 영화와 소설, 애니메이션을 참고해 다각도로 풀어낸다. 연출에 확신이 차 있고 배우들도 그걸 다 알고 있다”고 했다.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두 사람은 2000년 처음 만났다. 부산 시사 월간지 기자 출신 고 작가는 첫 희곡 ‘인류 최초의 키스’를 완성한 후 연출가를 찾고 있었다. 주변의 추천을 받아 부산에서 공연중이던 김 단장의 연극을 본 후 전화를 걸었다. 대본을 읽자
사소한 일로 타투기도 했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두 사람의 연극 철학은 같다. “무대는 사회적 문제의 발언대”라고. 공연 문의 (02)399-1095~6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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