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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타임스가 올해 3월 발표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시공사)에 보낸 찬사다. 1989년 35세에 발표한 소설 ‘남아 있는 나날’로 영미권 최고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른 이시구로가 10년의 침묵 끝에 발표한 이 소설이 발빠르게 한국어로 번역출간됐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5세에 영국으로 이주해 소설을 써온 이 작가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새로운 소재와 형식을 실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전작 ‘나를 보내지 마’에서 근미래 기숙학교를 소재로 인간의 존재 의미를 물었던 작가가 이번에는 아서 왕 이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모험담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도깨비와 기사, 용 케리그가 살고 있고 이 용의 입김이 온 땅을 망각의 안개로 뒤덮은 세상을 그려냈다.
시간적 배경은 기독교도 브리튼족과 이교도 색슨족이 피비린내 나는 정복 전쟁을 벌인 직후다. 참혹한 과거가 있었지만 망각의 안개로 인해 이들은 잔혹했던 과거를 잊은 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소설의 주인공인 브리튼족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망각으로 인해 이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낯선 여자에게 들은 질문에 아내는 혼란스러워한다. 두 사람은 결국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그 여정에서 색슨족 전사 위스턴과 신비로운 소년 에드윈, 아서 왕의 늙은 기사 가웨인 경을 만난다. 두 사람이 누구이며, 이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채 이들의 위험천만한 모험을 따라가던 독자들은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과거의 어두
이시구로는 유고슬라비아나 르완다 대학살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영국의 거장은 판타지 모험담을 통해서도 진정한 사랑과 용서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그가 내내 천착해온 질문에 관해 흥미로운 문학적 답변을 제시한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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