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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보화각을 지나 산길을 더 올라가려다 이런 나무 팻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칼 바람에 코끝이 시려온다. 기와집을 연상케 하는 살짝 들린 처마선의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발을 디뎠다. "안녕하세요."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손녀이자 이 집의 차녀인 화가 전인아 씨(47)의 목소리다. "건축가 김중업 선생님하고 제자들이 제가 태어나던 해 이 집을 완성했다고 하더군요. 이 집하고 저랑 나이가 같아요. 하하."
오전의 햇살이 거실 소파와 포장을 막 뜯기 시작한 그림들 위로 쏟아진다. 이달 8일 서울 중구 금산갤러리에서 개인전 '색(色), 동(動)'전을 발표하는 그의 신작들이다.
갤러리에 걸기 전, 부모님의 집에 작품들과 함께 들른 그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이번엔 얼마나 신랄한 평가를 받을까 싶은 눈치다. 그의 아버지는 간송의 장남이자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인 전성우 화백.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고 보성고 재단 동성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시 '와사등'을 쓴 김광균의 딸이자 공예 작가인 김은영 매듭장. 게다가 언니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인 전인지다. 미술에 일가견이 있는 남동생들과 올케까지 합치면 집안에 미술 전공자들은 차고 넘친다. 조선 최고 갑부였던 할아버지는 일제에 항거해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재산을 다 바친 그 유명한 간송 아닌가.
안목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안에서 작가 활동하기는 생각보다 수월치 않은 듯하다. "어렸을 때부터 칭찬에 목말랐어요. 제가 기가 약한 게 아닌데 가족 전체가 다 기가 세다 보니 속상할 때도 많지요. 술까지 들어가면 언니와 동생들의 평가도 장난 아니지요. 사회보다 가족의 평가가 가장 무서워요."
아버지에게 칭찬다운 칭찬을 받은 기억은 꽤나 오래 전이다. 서울대 미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잘했다"는 한마디가 전부였다. 인터뷰 도중 어머니가 거실에 나왔다. 딸의 그림 중 어떤 게 마음에 드냐는 질문에 "아버지(전성우 화백)는 얘에게 감각보다는 깊이에 치중하라는 말을 하죠"라며 "이 그림은 색이 좀 강하지 않니?"라고 물었다. "가족의 말이 무섭다"는 그의 말이 엄살은 아닌 듯했다.
1970년생인 그는 4남매 중 유일하게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명품 컬렉션으로 유명한 예술패밀리에서 4대째 화업을 잇는 주역이다. "가족의 무게감은 극복할 수는 없었어요. 벗어나고 싶다기 보다는 그거에 매달리다 보니 더욱 의존적이게 되더군요."
서울대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좌절의 연속이었다. 동기나 후배들이 작가로 일찌감치 잘 나가는 것에 기가 죽었다. 서울대 교수였던 서용선 작가는 수년 전 그의 개인전을 보러 와서는 "네가 작가가 될 줄은 몰랐다"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해 3년간 리모콘을 비롯한 제품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1997년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결혼과 출산으로 작가로서 명성은 그만큼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길의 끝에는 언제나 붓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것, 감정을 남김 없이 토로할 수 있는 것이 그림밖에 없더군요. 마흔이 넘어서야 제가 갈 길은 그림밖에 없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마음을 다잡은 후 3년 전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그 후 1년에 한번씩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자연스러운 이미지의 흐름이다. 화폭은 비구상에 가깝지만 새와 꽃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중국 고전 '산해경'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억지로 만든 게 아니라 흐르듯이 이미지를 그렸지요."
유독 새가 많이 등장한다고 하자 "새는 길조인 동시에 죽음을 상징한다"며 "새는 뼈가 많지 않아서 어떻게 그려도 어색하지 않다"고 했다. 새를 통해 상상력의 날개를 다는 것이다. 이미지 너머의 것을 탐하는 것은 화가의 숙명일 터. "어렵지 않고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주제의식과 완성도만 있으면 좋은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손가락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수없이 붓질한 결과물 40여점이 곧 갤러리 벽에 걸린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색(色)쓰는 것이 약한데 전 색에서는 자신이 있어요." 전시 명이 색의 움직임을 뜻하는 '색(色), 동(動)'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작업은 애증이에요. 힘들지만 또 제일 행복해요. 안 하면 몸이 아프죠. 미술이란 1
냉혹한 지적과 평가 속에 다져진 그가 진정한 작가로 거듭날 지 주목된다. 전시는 2월 8일부터 3월 3일까지. (02)3789-6317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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