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TV 프로그램에서 드럼신동으로 이름을 알린 김태현. <사진제공=CJ ENM> |
↑ 지난 11일 서울 CJ아지트 대학로에서 만난 '드러머' 김태현은 "재즈 속에서 국악이 새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진제공=CJ문화재단> |
가장 이질적인 재즈와 국악을 하나로 접목하는 '음악의 연금술'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김태현은 두 음악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색깔'을 꼽는다. 김태현은 "음악의 천재들이 즐비한 버클리에서 드럼만 잘해서는 도저히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면서 "국악의 리듬과 음의 접목을 선보이고 나서야 그들이 비로소 내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재즈의 대가들이 모여있는 교수진 역시 "남들과 똑같은 음악을 하지 말고, 너의 색깔에 집중하라"고 응원했다. 그후 천재 뮤지션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CJ문화재단이 버클리음대와 협업해 마련한 장학금도 그의 몫이었다.
↑ 20살의 김태현은 드럼 스틱을 잡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사진제공=CJ문화재단> |
"'드럼 신동이다, 천재다'라고 많이들 말씀하시지만, 저는 천재들에게 사사할 수 있었던 '행운아'에 불과합니다. 처음으로 드럼과 국악의 흥을 깨우쳐 주신 김희현 선생님, 사물놀이의 신명을 전수하신 김덕수 선생님, 외국인이면서 우리 것의 소중함과 음악의 본 뜻을 일깨우신 캐빈 해리스 교수님까지. 한분 한분의 지혜가 제 몸에 축적되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서양의 악기인 드럼의 대가로 한 발을 떼는 그이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의 소리에 천착(穿鑿)한다. 세계 어느 곳의 음악보다 풍요로운 소리임을 깨달아서다. 김태현은 "한예종에서 무악(巫樂) '동해안 별신굿'을 배웠을 때 '8박자', '10박자' 음이 묘하게 조화했다"면서 "생경한 음악이 연출하는 음율에 순식간에 매료됐다"고 했다. 이날 공연에서 그는 '구(舊) 아리랑'과 춘향가 구절인 '사랑가'를 편곡한 곡으로 첫 무대에 섰다.
김태현은 인생의 절반을 '천재'로 살았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버클리 음대에서 마주한 천재들에 둘러쌓여 주눅이 들기도 했고, 어려운 가정형편에 학업을 포기할까하는 마음이 일었던 것도 수 차례다. 그럴 때마다 그의 주위에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다. "제 재능 하나만 믿고 도움을 준 삼일미래재단, 영재교육원, CJ 문화재단에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껴요. 저도 어딘가에서 홀로 싸우고 있을 또 다른 '김태현'을 위한 나눔작업을 할 겁니다." 최근 아버지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고, 어머니는 암 투병 중이지만, 그의 시선은 어딘가에서 삶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작은 김태현'을 향한다.
그의 공약(公約)은 현재진행형이다. 2012년부터 완도 지역 소외 청소년들에게 악기 교육을 해주는 '청해진 예술단'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 있는 지금도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완도를 찾는다. 이번 공연에서는 완도에서 사사한 그의 제자가 함께 무대에 올라 의미를 더했다.
드러머이자 '드리머'(몽상가) 김태현은 꿈 꾼다. 방방곡곡 숨은 우리 소리가 서양의 악기 위에서 '소생'(蘇生)하는 아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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