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에 사는 김신영 씨(36·여)의 집에는 에너지효율 1등급인 보급형 벽걸이형 에이컨(소비전력 1.1kW)이 걸려 있다.
보통 에어컨을 틀지 않을 때는 한달 전기요금이 2만8000원에 조금 못 미치게 나왔다. TV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생활가전용품만 썼을 때 한달 전기사용량은 223kWh 정도였다. 그런데 에어컨을 틀면 그야말로 ‘요금폭탄’을 맞는다.
요즘 같은 찜통 더위에 하루에 6시간 정도 에어컨을 틀면 한달 전력소비량이 421kWh로 늘면서 전기요금 누진단계가 5단계로 껑충 뛴다. 요금도 10만원에 육박한다. 에어컨으로만 전기요금이 7만원가량 뛰는 셈이다. 요즘은 열대야가 이어지면서 밤에도 에어컨을 켜도 잘 수 밖에 없다. 김씨는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 전기요금을 계산해 봤다. 낮에 6시간, 밤에 6시간 해서 하루 12시간을 켜면 전기요금은 무려 23만2680원이 된다. 전기요금이 10배 이상 껑충 뛰는 셈이다.
만약 소비전력 1.8kW 짜리 스탠드형 에어컨이라면 같은 경우 전기요금이 47만원가량 나온다. 김씨는 “벌써부터 다음달에 날라올 ‘전기요금 폭탄’ 고지서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누진제, 고소득 1인 가구 혜택
한국의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는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징벌적’이란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100kWh 이하를 사용하는 1단계는 kWh당 요금이 60.7원이지만 6단계는 709.5원으로 11.7배나 뛴다. 여름에 에어컨을 장시간 틀거나 겨울에 온열기를 틀어놓으면 한달 전기요금이 수십만원씩 나오는 이유다.
반면 자영업자에게 적용되는 상업용(일반용)과 기업에 적용되는 산업용 요금은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상점들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는 것도 모자라 문까지 열어 놓고 영업을 한다.
만약 일반 가정에서 누진제 최고 구간에 해당하는 600kWh를 사용하면 전기요금이 21만원이 나오지만 기업은 5만원, 상점은 6만원 밖에 안 나온다.
누진제를 적용하고 있는 다른 나라는 대부분 3단계 이하 누진제를 채택하고 있다. 누진배율도 한국처럼 ‘폭탄’ 수준이 아니다. 미국의 누진배율은 1.1배(2단계), 일본은 1.4배(3단계), 대만은 2.4배(5단계) 수준에 그친다.
당초 정부가 누진제를 도입하면서 소득재분배 효과를 노렸지만 지금은 그런 논리가 많이 무색해졌다. 최근 생활패턴을 보면 오히려 고소득층일수록 1, 2인가구가 많고 비싼 제품일수록 에너지효율이 높아 이들이 원가 이하 전기를 쓰는 혜택을 누린다. 또 저소득층에서 겨울에 전기장판이나 온열기 사용이 많아지면서 반대로 보호받아야 할 저소득층이 피해를 입고 있다.
조성진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현행 체계에서는 결국 고소득 1인 가구가 가장 큰 혜택을 본다”며 “겨울에 전기온열기 사용이 많은 저소득층은 오히려 부담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전력사용 행태가 크게 달라졌는데도 소비자들에게만 절약을 요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소득 증가와 함께 대형 가전제품 수요가 늘면서 가구당 월 평균 전력은 1998년 163kWh에서 지난해 223kWh로 늘었고, 한달 사용량이 300kWh를 초과하는 가구 비중도 같은 기간 5.8%에서 29.5%로 뛰었다.
한국전력을 상대로 누진제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을 진행 중인 법무법인 인강 곽상언 변호사는 “TV 냉장고 등 기본적인 가전제품만 틀어도 한달 전기사용량이 200kWh가 넘는다”며 “우리나라의 주택용 전기사용량은 전체 사용량의 13%에 불과하고, OECD 국가 평균의 절반 이하로 이미 충분히 아껴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한국 전기요금은 싼 편”
반면 정부는 누진제가 과도한 수준이 아니며 부자감세와 전력대란 우려 때문에 완화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여름철 가구당 평균 전력소비량이 4인 가구 기준 360kWh인데 요금으로는 5만원 수준”이라며 “500kWh 이상을 써 6단계를 적용받는 가구는 전체의 4%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산업부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치와 비교한 우리나라 주택용 전기요금 수준은 61% 수준으로 저렴한 편이다. 그러나 누진제가 적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싸다고만 주장할 순 없는 상황이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지난해 주택용 전기요금 원가인 kWh당 144.9원 수준의 월 사용량은 325kWh(월 4만7050원)였다. 이 이하로 사용하면 원가보다 낮게 공급되고, 그 이상은 원가보다 높은 요금을 낸다는 얘기다. 한전 관계자는 “지난해 기준 전체 가구 평균 전기사용량이 223kWh에 그치고, 전체 가구의 67%가 한달 전기를 300kWh 이하로 사용하는 점을 감안하면 저렴한 요금 혜택을 누리는 가구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
채희봉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은 이날 누진제 완화 불가 방침을 밝히면서 “전기요금 누진제를 개편하면 전기소비량이 적은 가구의 부담이 늘어난다. 이는 1%를 위한 부자감세와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산업부의 이 같은 주장은 현실을 도외시한 억지 춘향식 논리라는 비판이 많다. 특히 부모 봉양 가구, 다자녀 가정 등 가구원 수가 많은 가구는 가구당 전력사용량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이를 1인 가구 전력 소비량과 단순 비교하는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중년 가장 입장에선 전기료 폭탄인데 이를 ‘부자감세’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여름철 한시 완화가 현실적 대안”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누진제는 에어컨이 사치품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만들어진 제도로 에어컨이 대중화된 현 시점과 맞지 않는다”며 “현재 6단계인 누진제 단계를 축소하고, 최저 단계와 최고 단계의 요금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조성진 연구위원도 “누진단계를 3단계 이하로 축소하고, 누진배율도 크게 줄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력업계 관계자는 “현재 최저 구간과 최고 구간의 요금 격차가 11.7배나 되기 때문에 징벌적 요금 체계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라며 “요금 격차를 4배 이내로 줄이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언했다.
정부가 누진제를 폐지하거나
홍준희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는 “누진제 논란은 매년 여름철 두 달 동안 나오는 이슈”라며 “지난해처럼 7~9월을 하던지 아니면 매년 7~8월에 대해서만 한시적으로 누진단계를 완화해 주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고재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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