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현대차와 같은 국내 주요 제조업체들이 최근 적극적인 미국 내 투자의지를 밝힌 것은 트럼프 정부의 강경한 보호무역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글로벌 기업들에게 트위터를 통해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멘트를 잇달아 날려온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요구를 국내 제조업체가 사실상 수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멕시코 티후아나와 레이노사 몬터레이 등에서 북미 시장을 겨냥한 TV와 생활가전 제품을 생산해 온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최근 전략 수정에 나섰다. 가전제품은 스마트폰과 달리 3~5% 수준의 낮은 영업이익률을 올리는 게 고작이다. 1%의 이익률을 갖고 승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의 공언대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백지화돼 멕시코산 가전제품을 미국에 수출할 때 큰 폭의 관세폭탄을 맞게 된다면 가격경쟁력에서 뒤쳐지게 된다. 미국에 비해 임금이 저렴하면서도 관세 혜택까지 얻을 수 있었던 멕시코 공장의 투자매력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LG전자는 현재 미국에 생활가전 공장을 짓기로 결정하고 테네시주를 비롯한 후보지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조성진 LG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CES2017' 기간 중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상반기 중에는 (미국 내 생산기지 건설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정리될 것 같다"며 "80% 정도는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텍사스 오스틴의 반도체 공장 보완 투자와 함께 지난해 인수한 미국 가전브랜드 데이코의 빌트인 냉장고 현지 생산을 결정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미국 현지에 가전 공장을 짓는 것도 추가로 검토 중이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현대차그룹도 지난달 정진행 현대차 사장이 외신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에 2021년까지 5년간 31억 달러(약 3조 7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히며 트럼프 정부 정책에 화답하고 나섰다. 투자금액은 과거 5년 전에 비해 10억 달러 가량 늘어난 숫자다. 정 사장은 "친환경차와 자율주행 등 미래 신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 확대 등에 전체 투자금의 30~40% 가량을 쓸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현대차그룹은 미국 산업수요 추이를 감안한 공장 신·증설 여부도 검토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기와 지역, 규모, 설립주체 등 세부적인 사항은 아직 미정이다. 현재 현대차는 미국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에, 기아차는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에 각각 30만대 생산규모의 공장을 가동중이다.
트럼프의 미국 내 투자 드라이브에 가장 당황하는 곳은 기아차다. 기아차는 30억 달러를 투자해 지은 멕시코 공장을 지난해 5월 가동하기 시작했다. 연산 40만대 규모의 소형차 전용 생산기지로 구축된 이 곳은 생산물량의 80%를 미국 등에 수출할 계획이었다. 지난해 이 곳에서 약 11만대의 준중형 세단 K3(미국명 포르테)를 생산한 기아차는 올해는 차종도 두 개를 새롭게 추가해 25만대로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맹공 때문에 증산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글로벌 기업도 미국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의지를 밝히고 있다. 미국 기업 캐리어는 인디애나 공장을 멕시코 게레타로로 이전하려고 계획했다가 미국 대선 기간 동안 트럼프의 압박을 받고 결국 이를 철회했다. 공교롭게도 게레타로는 국내 기업인 삼성과 LG가 북미 등에 수출하는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GM과 포드 등에 이어 도요타와 다임러 등도 차례로 미국에 생산 시설 이전이나 증설 투자 등을 발표한 상태다.
글로벌 주요 제조업체들이 잇달아 미국 내 투자 확대를 선언했지만 밝은 표정은 아니다. 멕시코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이 미국에 비해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물류비 등을 감안하더라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익률이 낮은 생활가전 제품이나 소형차 등에 대해서는 더욱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주요 제조업체들의 미국 내 투자는 생산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결국 이 비용을 소비자들이 져야 할 가능성도 높다. 애플이 생산기지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길 경우 당장 인건비만 10달러에서 최소 40달러로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인건비 외에 다른 비용까지 감안하면 아이폰 가격이 현재보다 두 배 가까이 오를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국내 업체들이 생산기지를 현체제로 유지하는 대신, 생산비를 줄이고 품질도 높이는 방식으로 정면대응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특히 가전이나 자동차처럼 규제가 많거나 반덤핑 관세를 물릴
국내 가전업체 관계자는 "중국 하이얼이 인수한 GE 공장도 현지에서 정리하는 마당에 우리 기업이 미국서 공장을 운영하며 이익을 남기기란 쉽지 않다"며 "미국으로 동반 진출할 협력업체를 찾기도 어려운 분위기"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 이동인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