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좋은 정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바뀌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은 여전히 정부 주도적이다. 정부는 좋은 환경만 만들어주고 지원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
과학기술계와 산업계 전문가들이 한국의 연구개발(R&D) 정책을 담당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향해 쓴소리를 했다. 정부가 변하지 않는다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변화에 한국만 낙오될 수 있다는 우려도 쏟아졌다.
8일 서울 켄싱턴호텔 여의도에서 열린 '미래과학기술 오픈포럼'에 참석한 발표자와 토론자들은 하나같이 정부 주도의 R&D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유행을 쫓는 연구, 행정업무에 쫓기는 과학기술자, 부처 장벽에 가로막힌 R&D 융합 등 고질적인 한국의 R&D 관행이 수년째 바뀌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성토가 이어졌다.
과학기술한림원과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이 공동 주최한 이날 포럼은 '미래 한국을 열어갈 12가지 과학기술'을 주제로 개최됐다. 이날 포럼에는 임대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정병선 과기정통부 연구개발정책실장 등 정부 인사들을 비롯해 오세정 서울대 명예교수, 문승현 광주과학기술원(GIST) 총장, 차국헌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 등 100여명의 과학기술계 인사가 참석했다.
◆녹색경제->창조경제->4차 산업혁명… "R&D과제가 유행따라 흘러"
'미래한국을 위한 과학기술과 정책'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는 정부의 R&D 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이영 테르텐 대표이사는 "정부가 우리나라의 R&D 정책이 어떻게 바뀌어야 되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며 "문제는 수년이 지나도 현장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운을 뗐다. 이영 대표이사는 "오히려 정부 R&D 과제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산업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대표적으로 과도한 행정업무를 꼽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수년 전부터 과학기술계에서는 정부R&D 과제를 수행할 경우 행정업무가 과도한 부담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부처별로 서로 다른 과제 양식은 물론 종이 영수증까지 챙겨야 할 뿐 아니라 연구비로 구매할 수 있는 연구장비도 제한돼 있었다. 이영 대표이사는 "결국 우리 회사는 정부 R&D 과제를 신청하지 않는다"며 "누구를 위한 과제인지 알 수 없다"고 꼬집었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유행처럼 바뀌는 국가 주도 R&D 프로젝트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 시절 '녹색경제', 박근혜 정부 시절 '창조경제'에 이어 현 정부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필두로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의 '유행'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영 대표이사는 "연구 과제가 예능인들처럼 왜 트렌드를 따라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 주도 R&D, 민간주도로 바꿔야
오세정 서울대 명예교수는 R&D정책에서 정부가 '보스'에서 '서포터'로 전환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과거에는 정부주도의 R&D 정책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시대가 바뀐 만큼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며 "정부는 필요한 연구를 뒤에서 잘 지원해야 한다. 우리나라 정부는 아직도 너무 친절하다"고 지적했다. 오세정 명예교수는 과거 한국연구재단과 기초과학연구원(IBS) 재직시절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그는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중력파' 연구는 미국국립과학재단(NSF)이 20년 전 연구 지원을 결정했던 분야"라며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NSF 관계자들에게 "수십년 뒤를 내다보는 지원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NSF는 이런 일을 하라고 만든 기관"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오세정 명예교수는 "미국한림원에서 인공지능 시대에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는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며 "정부가 할 일은 '인력양성'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한국의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에 방점이 찍혀있다"며 "이제는 정부가 한발 물러서서 투자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차국헌 서울대 공대 학장은 "3년 뒤 5년 뒤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정부가 5~10년 단위 계획을 세우는 것은 맞지 않다"며 "부처마다 너무 많은 계획이 존재하다 보니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큰 그림만을 그리고 우수한 정책을 만들면 한국의 뛰어난 역량을 가진 과학기술자들이 이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며 "4차 산업혁명 시대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같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0년 기다려 수조원 보는 '예다'… 한국에선 불가능
기초과학 연구소인 이스라엘 바이츠만 연구소는 기술사업화를 통해 매년 수조원에 달하는 로열티를 벌고 있다. 기술사업화의 핵심은 기술과 산업을 연계하는 '예다'라는 기관이다. 이 기관은 정부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토론참석자들은 바이츠만 연구소와 예다의 협업을 눈여겨 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영 대표이사는 "예다가 설립되고 첫 매출이 나오기까지 40년이 걸렸다"며 "현재 정부의 지원금은 '0'인데도 불구하고 기술수준이 올라 전 세계 기업들이 함께 연구하기 위해 줄을 서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어떤 특허는 100년 동안 특허료를 지불한 뒤에야 수익이 나왔다고 하는데 과연 이같은 일이 정부 주도의 R&D 정책에서 이뤄질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오세정 명예교수는 "바이츠만 연구소는 예다와 정부에서 운영비를 지원 받는다"며 "정부 지원이 적기 때문에 연구에 간섭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바이츠만 연구소 관계자들에게 한국의 기초과학연구원의 예산 95%를 정부에서 받는다고 말하자 그러면 정부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더라"며 "과학기술자와 민간기업도 정부에게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잘 할 수 있다는 큰 그림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병선 과기정통부 연구개발정책실장은 "과학기술계에서 말하는 지적에 동감한다"며 "17개 부처별로 다른 행정절차를 바꾸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감사 나올때까지 믿지 못하겠다'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건강한 과학 커뮤니티가 생성되고 연구자들의 '피어리뷰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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